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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첫 순교자 강종근 목사

글: 이상욱 목사 (철원제일감리교회) | 기사입력 2026.03.0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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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제일감리교회(구, 철원제일교회)는 1905년 장로교 웰본(Welbon) 선교사가 개척했다. 1907년 선교구역 분할정책으로 철원이 감리교 선교지역이 되며 철원읍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철원읍감리교회는 영서북부지역의 선교와 교육, 사회봉사의 중심이 되었다. 1919년 3월 10일 강원도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항일단체인 철원애국단이 조직되어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일제의 박해에도 교회가 성장하여 지금의 터로 이전했다. 당시 유명한 건축가 윌리엄 보리스(W. M. Voris)가 교회를 설계했다. 1937년 9월 30일, 198평의 2층 석조건물이 아름답게 완성되어 성도 모두가 예배당을 봉헌했다. 교회의 이름을 철원제일교회로 정했다.

     

    당시에 교인 수는 어린이가 275명, 장년이 337명이었다. 교회는 유치원과 학교, 구세복음병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선교가 활발해지고 부흥하기 시작한 교회에 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첫 순교자인 강종근 목사가 1939년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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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종근 목사, 철원제일교회 담임목회 시작

     

    강종근(姜琮根) 목사는 1904년 9월 29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부친 강영동과 모친 박형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만주 봉천성 유하현으로 이주해 학교에 다녔다. 1925년 배재학당을 졸업했고, 1928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윤희성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부모가 있는 만주 철령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1936년 경기도 연천교회 담임전도사로 부임하여 2년간 목회하였다. 당시 강종근 전도사는 하나님의 복음과 함께 조선 민족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교했다. 강 전도사는 1938년에는 강원도 철원군 김화 창도교회에서 사역했고, 1939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감리회 정회원이 된 후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했다.

     

    ▪ 강종근 목사, 신사참배 거부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민족 종교인 신도(神道)를 국교로 삼고 일왕을 천황으로 신격화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 신사참배를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가 의식’이라고 규정하고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감리회도 이미 신사참배를 결의했으나 강종근 목사는 설교 시간에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1941년 9월 강 목사가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던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 검속령’에 의해 검거됐다.

     

    강 목사가 검거되는 상황을 당시 5살이었던 막내딸 서옥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일본 순사가 아버지를 잡으러 주일에 교회에 왔습니다. 아버지의 주일 설교 본문 말씀이 대부분 출애굽기였고, 우리나라는 반드시 일본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설교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만은 아버지께서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설교를 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순사가 눈앞에 나타나자, 아버지는 당당하게 ‘우리나라는 반드시 일본으로부터 해방된다’라고 설교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나는 어렸기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지만, 이날의 일은 기억하고 있으며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 강종근 목사, 끝내 순교하다


    강종근 목사는 철원경찰서에 구금되어 고문과 매를 맞으며 가혹행위를 당했고, 서울로 이송됐다. 이 소식을 들은 철원제일교회 성도들은 소리 없이 철원역으로 모였다. 그리고 찬송가 222장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를 불렀다. 일제는 강종근 목사가 설교와 청년부 간담회에서 민족주의를 고양해 조선독립을 꾀했다는 죄목을 씌워 1941년 10월 9일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1941년 형공 제1587호). 강 목사는 연천교회 담임 때부터 교회 청년들에게 희망을 품고 열심히 공부할 것을 격려했다. 특히 창도교회에서의 사역이 양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형기는 1년 6개월이었으나 90일간의 미결 구류(未決拘留)기간 중 받은 혹독한 고문으로 쇠약해진 강 목사는 서대문형무소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생명이 위독했다. 간수들은 강 목사를 방치했고, 죽기 직전에 형무소 땅바닥에 눕혀놓고 가져가라고 했다(윤희성 사모 비망록). 급히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옮겨서 치료하려고 했으나, 1942년 6월 3일 새벽에 끝내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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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종근 목사는 마지막 면회에서 윤희성 사모에게 원수를 사랑할 것을 당부했다. “여보, 나는 주님 곁으로 갑니다. 절대로 나를 취조하고 감옥에 보낸 일본 경찰을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세요. 우리 네 명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다 키워 주시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찬송가 488장 ‘이 몸에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를 불렀다. 1942년 6월 3일 38세인 강종근 목사는 신앙을 지키며 죽도록 충성하다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하나님 나라로 갔다. 숨지기 직전 “나는 마음이 기쁘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순교자 강 목사는 2003년 8월 15일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그의 유해는 2006년 11월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 적색의 순교와 백색의 순교

     

    철원제일감리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순교자 강종근 목사의 신앙을 본받아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하고 있기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도 십자가의 신앙이 있으며, 만일 ‘예수 믿으면 죽는’ 일이 생길 때, 모두가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리라 확신한다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 피 흘림이 ‘적색의 순교’라면, 꼭 죽어야만 하는 순교가 아닌 살아서 순교자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주님을 위하여 섬기는 교회에서 이전보다 더 눈물 흘리며 헌신의 땀을 흘리는 것을 ‘백색의 순교’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 모두가 ‘백색의 순교자’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되, ‘내가 주님의 뒤를 따라가니 나는 마음이 기쁘다’라는 믿음으로 신앙생활 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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