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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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nnovate, 더 나은 의 (5)■ 바리새인의 가르침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43) ‘더 나은 의’ 를 추구하기 위한 다섯 번째 과정은 ‘원수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레위기의 율법을 언급하십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8) 본래 하나님의 율법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도 갚지 말고 사랑하라"는 명령은 매우 부담스러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레위기의 말씀에 내포된 부담감을 감당하지 못했는지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그 의미를 완화시켰습니다. 그들은 ‘네 몸과 같이’ 를 빠뜨린 채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그리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하신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미워해도 된다는 허용으로 간주했습니다. ■ 예수님의 재해석 그러나 이와 같은 가르침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재해석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마 5:44) 구약의 율법은 이웃을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 율법을 성취하신 예수님은 그 사랑의 대상을 원수에게까지 확대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선한 이웃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적대시하고 괴롭히는 원수 이웃은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콕 집어서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원수사랑 명령을 표현한 동사는 헬라어 ‘아가파오' 입니다. 나를 적대하는 사람에게 ‘관대하고 자비로운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기도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우리에게 손해를 입히고, 모욕과 수치를 주고, 배신감을 안기며, 이유 없이 깎아 내리고, 늘 하는 일에 반대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명령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령이다. 기도하는 매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원수들에게 가고, 그의 편이 되며, 그를 위해 하나님께 탄원한다.’’ 마음속에 원수에 대한 사랑이 조금이라도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위해 기도하려 한다면 원수 사랑을 절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먼저 해야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기준으로 삼으면 결코 우리의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원수에게 사랑으로 되갚아 주는 단계까지 니아가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짧은 문장이라도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을 위해 기도문을 적어 보십시오. 그러면 본 회퍼의 말처럼 그 사람에게 다가가고, 그의 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저히 품을 수 없을 것 같던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증오하는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원리를 통해 ‘더 나은 의’를 실천하며 살아갈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2) 사랑의 지경을 넓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6~47) 유대인들은 세리가 로마와 헤롯을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담당했기에 창기와 마찬가지로 부정한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이방인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자신의 가족을 사랑할 줄 알고, 친구를 존중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선대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자기가 속한 집단의 구성원에게만 제한된 사랑은 세상이 기대하고 실천하는 수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나은 의’를 추구하기 위해 사랑의 지경을 넓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지경을 넓히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본능적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 중 대부분의 시간을 나 자신을 위해 보냅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자기 이익’이라는 렌즈를 통해 자기 중심적 삶을 살아가라고 부추깁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관계를 내 이익에 근거해 평가함으로써 나에게 별로 도움되지 않는 사람들과 사물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이러한 관점이 강화되면 타인을 바라보는 마음이 점점 사라집니다. 내 마음에 드는 대상만을 골라서 사랑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취향입니다. 사랑과 취향은 다릅니다. 우리가 사랑을 취향으로 이해한다면, 나의 취향에 맞는 존재가 사랑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내 안에 그를 향한 좋은 감정이 없다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내 삶의 경계를 넘어서 내게 찾아온 상대방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상대방에게 가치를 두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제대로 주목함으로써 사랑의 지경을 넓힐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온전함’은 목표에 도달함 또는 ‘성숙함’ 이라는 의미 입니다. 성도의 ‘온전함’은 ‘완전함’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흉내내는 가운데,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온전함’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먼저 말씀하신 후에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온전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는 스스로 온전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온전하라’로 번역된 단어는 ‘중간태’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 명령은 능동태로써 온전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려는 사역에 열심히 참여하라는 의미입니다. 온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우리가 그 수준까지 성장하기를 예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원수 사랑’을 이렇게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나를 힘들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한 상대를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복을 빌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할 때 하나님은 그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 주십니다. 원수를 축복할 때 하나님은 그 원수를 축복하는 사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 원수를 사랑하는 자리까지 나아갈 때 비로소 ‘더 나은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 ■ 더 나은 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통해 원수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서기를 바라셨습니다. 나 중심에서 벗어나 사랑의 지경을 넓혀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닮아가며, 원수를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할 수 있는 온전함에 이르기를 당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더 나은 의를 추구하며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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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novate, 더 나은 의■ 더 나은 의 예수님은 ‘의’에 대해서도 바리새인들과 대립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의’란 율법주의가 낳은 ‘자기 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문자적 의와 전혀 다른‘의’를 강조하시며, 이를 ‘더 나은 의’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예수님은 율법에 철저한 이 바리새인들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체 무슨말씀일까요?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바리새인의 의는 형식적이고 문자적인 의였습니다. 문자로 기록된 율법만 범하지 않으면, 그 속은 어떻든 관계없었습니다. 율법을 준수하되 정의, 긍휼, 믿음과 같은 율법의 기본 정신을 놓친 채 자기 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더 나은 의는 형식이나 문자적인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과 본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율법에서 말하는 살인죄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문구로 대조를 만들며 더 나은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21) 율법에는 ‘살인’과 관련된 계명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민수기 35장 31절에서는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피는 땅을 더럽히(민35:33)’기 때문입니다. 피를 흘림으로 누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앗아갔다면, 그 피는 땅을 더럽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피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살인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앞의 규정을 재확인하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민34:35).”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택한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땅을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피로 더럽히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생명’과 관련된 율법에는 사실 금지 명령보다 ‘생명을 존중하라’는 적극적 행동 명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배우고 가르친 것은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였습니다. 살인하면 재판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의 재판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방 재판소였고, 하나님의 심판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새롭게 해석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라가’는 유대인들의 욕설로 직역하면 ‘헛된 놈’, ‘바보같은 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갖는 모든 편견과 시기, 중상모략, 투기,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 모든 무책임한 말, 음모, 헛소문 퍼뜨리는 것, 수군거리는 것 등 모든 것이 ‘라가’에 포함됩니다. 또 ‘미련한 놈’은 ‘하나님 앞에서 가치 없는 놈’, ‘하나님 앞에서 천벌 받을 놈’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왜 저런 인간을 다 만드셨는가?”라고 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분노하는 것’, ‘라가라고 욕하는 것’,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을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죄의 출발은 자기 마음입니다. 상대를 모욕하는 말을 했다면, 이미 내 속에서 상대를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살인이 우리 마음에서 먼저 일어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살인을 금하는 세상의 법과는 다른 깊은 뜻이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이 살인 행위 자체를 정죄했다면, 예수님의 성취적 가르침은 살인 행위의 심연으로 들어가서 살인 행위를 일어나게 하는 마음의 분노와 그로 말미암은 욕설까지 문제삼습니다. 살인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마음 속에 살의를 품은 것과 그런 마음으로 내뱉는 말들도 살인죄와 동일하다고 하십니다. 요즘은 직접적인 말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간접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인터넷 댓글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모함하고 인격을 모독합니다. 이런 악의적 댓글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정신적, 정서적 살인이 횡행하는데도 ‘나는 살인한 일이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시대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관련하여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쉽게 분노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에게 바보라고 함부로 말했다면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 아래에서 ‘더 나은 의’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살인을 유발하는 그릇된 마음을 다스리는 것까지를 요구합니다. 과연 더 나은 의를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 더 나은 의를 위한 화평 예배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마5:25) 예수님은 예배 드리기 전에 먼저 인간관계에서의 갈등과 미움을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잘못한 일이 있다면 재판정에 가기 전에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사화(私和)’는 법으로 처리할 송사(訟事)를 개인끼리 서로 좋게 풀거나 원수였던 사이가 원한을 풀고 서로 화평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함께 길에 있을 때’는 ‘재판정으로 가기 전에 그 사람과 화해할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용서할 일이 있으면 용서하고, 용서받을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용서를 구하여 갈등을 해소해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 화평한 삶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드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3:15) 갈등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을 구하십시오.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심판관이 되시면 내 욕심을 내려놓고 화평하게 하는 삶을 살 수있습니다. ■ 더 나은 의를 위한 말 야고보서 3장에 보면 우리의 혀가 범하는 범죄에 대하여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약3:6)”고 말씀하십니다. ‘불’은 혀에서 비롯된 엄청난 파괴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혀를 통해 나옵니다. 그래서 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또한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3:8)”고 경고합니다. 날아다니는 새나 바다의 동물이나 심지어 벌레나 곤충도 길들일 수 있지만, 절대 길들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이 쉬지 아니하는 악이 되지 않도록, 누군가를 죽이는 독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나 법의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더나은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노력하는 삶, 말로 살인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Innovat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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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novate, 자랑과 기쁨이 되는 교회■ 자랑과 기쁨을 넘어 감사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에게 자랑과 기쁨이 넘치는 교회(살후1:4)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랑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자랑은 감사로 이어집니다(살후1:3). 바울이 자랑과 기쁨을 넘어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데살로니가 교회에 ‘믿음의 성장’ (살후1:3)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첫 편지를 보낸 지 일 년 정도 지난 후 데살로니가 후서를 썼습니다. 그 사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1년 전과 1년 후가 달라야 합니다. 성도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변화와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아는 만큼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을 제대로 알아야 바른 믿음이 생기고, 또 믿음이 자라게 되는 법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이 원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가르침의 의미를 더 깊이 알아갈수록 그들의 믿음도 더욱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크기(size)’ 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의 말씀을 봅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겨자씨의 특징은 매우 작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초점은 ‘크기’ 가 아니라 ‘생명력’ 에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으로 보일지라도 그 안에 생명력이 있으면 엄청난 능력이 발휘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에는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지역에 본이 되었고, 먼 데까지 소문이 퍼졌습니다(살전1:7~8)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어떻게 믿음이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씀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당시 사람들이 아고라에 모여서 변론하던 것과 달리, 선포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된 자세로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자기 편견이나 고집, 선입견을 배제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아멘’ 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마다 간절한 믿음이 담긴 고백을 드렸습니다. 말씀에 대한 열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더 깊이 알아가게 했고, 믿음을 성장시켰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적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먹어야(벧전2:2)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아멘으로 말씀을 받아, 날마다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말씀을 잘 알아가도록 노력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결속이 믿음이 성장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크고 작은 핍박 속에 살고 있었지만, 오히려 서로 격려하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고, 더욱 바르게 살고 믿음으로 살고자 애썼습니다(살후1:4). 어려운 상황 가운데 더욱 결속하여 서로에게 믿음의 격려를 나누었습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서로 격려하는 ‘결속’, 믿음의 고백이 흔들리지 않도록 서로 보살펴 주는 ‘결속’,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결속’ 이 있었기에 그들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가정도 믿음으로 결속할 때 더욱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제하여 결속하는 것은 믿음의 성장에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모임에 더욱 열심히 참여해야 합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 던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성도들의 모임에 성실하게 참여하면 믿음이 잘 성장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한 첫 번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말씀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알고 믿어 믿음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배와 모임을 통해 서로 결속했습니다. 그리하여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바울이 자랑과 기쁨을 넘어 감사하는 두 번 째 이유는 무엇일까요? 풍성한 사랑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성도들을 향한 서로 사랑을 강조 했습니다. 일 년 후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형제 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살전 4:9~10) 사랑에는 많은 수고가 따릅니다. 기대만큼 결과가 따라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수고를 성가시게 여기지 않고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 사랑은 데살로니가 안에만 머물지 않고 마게도냐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사랑이 풍성해질 수 있었을까요? 형제 사랑은 조용히 행하는 것(살전4:11)입니다. 내적인 변화 없이는 진실한 변화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처럼 시끄럽게 하지 않고, 조용히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합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열매를 맺게 됩니다. 형제 사랑은 절대로 사람의 주목을 끄는 방식이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역사해서 조용한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만지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 사랑이 풍성해진 비결입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내 손으로(살전4;11)’ 행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 해야 할 첫걸음은 자기 손으로 성실하게 일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일에 성실하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형제를 돕기 위해 필요한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내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것이 형제 사랑입니다. 누군가의 슬픔에 함께 공감하고 동참하는 것이 형제 사랑입니다. 삶의 작은 여유를 나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내 손으로 형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 또한 형제 사랑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따뜻한 사랑이 느껴져야 합니다. 몇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풍성하게 베푸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까? 요란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시선과 방법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방식으로 생명을 살리는 사랑이 조용히 만들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내 일과 내 할 도리를 ‘내 손으로’ 성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자신에게만 시선을 두지 않고 주변에 손을 내밀고 공감해야 합니다. ■ 자랑과 기쁨이 되는 영은교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자랑을 넘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해졌기 때문입니다. 즉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영적 혁신이 바울의 자랑과 기쁨이며 하나님께 감사 하는 이유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웃과 하나님께 이와 같은 자랑과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대한 열정과 상호 결속으로 믿음이 성장하는 교회, 조용히 내 손으로 행하여 형제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는 교회,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Innovat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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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간절한 기도■ 검을 준비하라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 십자가의 길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눅 22:36) 예수님께서 검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목숨을 바쳐서라도 믿음을 지키라는 의미였습니다. 즉 영적 능력의 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능력의 칼이 무엇인지 직접 가르쳐 주십니다. ■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 예수님은 습관에 따라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1) 기도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방어하는 과정입니다.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눅 22:40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냥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력이 다양한 형태와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여기서 ‘빠지다’ 로 번역된 단어는 영향권 아래에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즉 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것에 종속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곧 제자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라는 유혹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믿었던 모든 것이 단번에 무너질 수 있는 수많은 유혹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 하십니다. 즉 기도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방어하는 방법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는 유혹을 당할지라도 그것에 떨어지지 않고 이겨낼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유혹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는 생각입니다. 내가 가진 물질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육신의 정욕’ 을 채우기에 급급한 삶을 살아가도록 유혹합니다. 나를 만족시킬 모든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목의 정욕’ 으로 눈이 멀게 하는 유혹입니다. 나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이기적 생각은 ‘이생의 자랑’ 에만 관심을 갖게 하는 유혹입니다. 이와 같은 유혹은 우리를 ‘하나님 중심’ 에서 ‘인간 중심’ 으로 이끌어 갑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성을 좌로나 우로 치우치게 만들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을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약한 인간인 우리는 언제든 유혹에 빠지고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유혹과 시련이 우리를 거칠게 흔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과 죄에 굴복당했을지라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힘은 바로 기도에서 나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할 때,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영적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이와 같은 영적 능력의 칼을 갖추라고 하십니다. 2)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 22:42) ‘아버지의 뜻’ 은 이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이 잔은 ‘진노의 잔’ 입니다. 예수님은 ‘진노의 잔’ 을 마셔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 임박한 순간에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연약한 인성(人性)의 모습이 보이는 표현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감당하신 구속 사역이 얼마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지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순조롭고 편안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르신 것이 아닙니다. ‘땀이 핏방울 같이’ 될 때까지 힘쓰시고 애쓰시고, 더욱 간절히 기도하고 인내하심으로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아버지 앞에 홀로 무릎 꿇고 기도하시며 아버지 뜻대로 순종할 것을 고백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에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존경과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 입니다. 기도는 그저 우리의 소원을 관철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날 밤 기도의 절정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된 기도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꺾어 아버지께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였듯이 가장 위대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고, 가장 위대한 삶은 기도로 발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의 뜻, 하늘의 뜻보다 내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라는 기도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면서도 속으로는 ‘주의 뜻이 내 뜻과 맞아야 되는데’ 라고 염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이미 주신 주님의 응답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기도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뜻과 달라도 응답은 응답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응답이 나중에 보면 우리의 뜻보다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좋은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이와 같은 영적 능력의 칼을 갖추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3) 기도는 위로를 위한 과정입니다.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눅 22:45)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육신의 피곤함에 굴복하지 않고 더욱 힘쓰고 애쓰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후 제자들에게 가신 예수님은 그들이 잠든 것을 보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제자들이 잠든 이유를 '슬픔’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한편 마태복음은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제자들은 지금 고통과 근심으로 가득합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슬픔으로 인하여 육신이 약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사실 그대로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의 형편을 마음 깊이 헤아리며 바라보고 계십니다. 지금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기 보다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드러낸 제자들에게 위로를 보내고 계십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긍휼의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책망보다 위로를 통해 제자들에게 필요한 영적 능력의 칼을 소유하도록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위로를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처럼 ‘위로의 기도’ 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의 칼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 영적 능력의 칼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 능력의 칼은 어떤 것입니까? 먼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방어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가 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으로 사는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대충대충 기도하는 무기력한 삶이 아니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영적 능력의 칼이 있습니다. 또한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응답도 응답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이 가장 좋은 응답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영적 능력의 칼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위로를 위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긍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영적 능력의 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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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novate, 경험■ 베드로의 경험 베드로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있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어부로 살아가던 어느 날,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사람이 베드로의 배에 올라 무리에게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지금까지 익숙한 장소에서 살아오며 쌓아온 '선경험의 틀'이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서의 베드로가 축적해온 자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지금껏 고수해 온 자신의 틀을 무너뜨립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니, 그동안 굳게 지켜 온 '선경험의 틀'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체험이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고 하십니다. 베드로를 새로운 소명의 자리로 부르시고, 새로운 차원의 성장을 예고하십니다. 말씀을 들은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릅니다.(눅5:11) 새로운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확신이 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별을 예고하십니다. 베드로는 의아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죽음의 길이라는 사실을 조금은 감지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그는 다시 한번 묻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고 하시며, 도리어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 예언합니다. 닭이 울기까지는 기껏해야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때였습니다. 지난 3년간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던 베드로가 얼마 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니 아마 베드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한 일이 발생합니다. ■ 베드로의 실패베드로는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체포되어 간 예수님의 재판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재판 장면을 바깥뜰에서 지켜봅니다. 이 때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외칩니다. 여종의 추궁에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마26:70)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옆에서 당당하고 용감했던 수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는 순간 작은 공격에도 속절없이 '실패자의 자리'로 추락합니다. 여종의 추궁을 듣고 두려움을 느낀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을 출입하는 '앞문까지' 이동합니다. 이때 또다른 목격자가 등장합니다. 다른 여종이 많은 사람들에게 베드로의 정체를 밝힙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위협을 느낀 베드로는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2)" 하며 강하게 부인합니다. '맹세'는 자기 저주의 요소를 첨가하는 말로, 맹세한 내용이 사실이 아닐 경우 자신이 저주를 받아 죽으리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으로 얼버무리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강력하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진실로 그 도당' 이라고 합니다. '도당' 이라는 말은 그들 중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진실로'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베드로의 정체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사람들의 말을 강하게 거부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 하고 맹세하면서까지 예수님과 상관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후 지난 3년 동안 굳게 지녔던 확신을 저버리는 처절한 실패를 경험합니다. ■ 베드로의 경험을 넘어하지만 베드로의 인생은 실패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실패의 경험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펼쳐나갑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습니까?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75)" 베드로에게 통곡은 어떤 의미입니까?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자신을 통한히 여기며 눈물 흘리는 자리입니다.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한없이 나약한 자신을 책망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리입니다. 다 예수님을 떠나도 자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큰 소리쳤던 자신이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순간을 곱씹으며 눈물을 흘리는 자리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확인하며,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는 눈물의 자리입니다. 이 눈물이 베드로가 실패를 극복할 수 있었던 첫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베드로가 다시 설 수 있었던 데는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사탄은 끊임없이 베드로를 흔들어 그의 믿음이 떨어지기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한순간 믿음이 떨어지더라도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회복시켜주시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는 갈릴리 호수였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갔었고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채 날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실망감에 사로잡힌 자들이 지친 몸으로 앉아 있습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호숫가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과 생선으로 조반을 함께 나눠 먹습니다. 조반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21:15)"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씩이나 물어보십니다. 반복된 문답을 통해 베드로에게 의도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하게 하십니다. 이 과정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과거의 사건을 뼈저리게 생각나게 합니다. 동시에 세 번의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의 손을 베드로에게 먼저 내미시며, 베드로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랑의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그 사랑의 고백에 힘이 있습니다. 더 이상 그는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실망하고 좌절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존재도 아닙니다. 과거에 지은 죄에 치여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회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도 아닙니다. 사랑의 고백이 회복되는 순간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Innovate데이빗 A 씨멘즈의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당신 자신의 가치와 귀중함에 대한 인식을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공급받도록 하고 당신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거짓된 영상에 의존하지 말라. 여기서 '거짓된 영상'은 과거의 실패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떨어뜨리기 위해 거짓된 영상을 계속해서 떠올리도록 요구합니다. 거짓된 영상 즉 '실패한 경험'에 얽매이게 합니다. 실패했고, 상처받았고, 주저않았던 경험의 영상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속삭임을 단호히 거부하고, 거짓된 영상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말씀의 능력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내야 합니다. 사탄이 베드로에게 '거짓된 영상'을 보여주며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없도록 믿음을 포기하게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거짓된 영상을 계속 보여주며, '과거의 실패한 경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흔듭니다. 그러한 때에 베드로를 위해,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던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우리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고 계산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기도의 힘과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말씀의 능력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주로 긍정적 경험만을 좋아하고, 부정적 경험은 기억하기조차 싫어합니다. 하지만 긍정적 경험이든 부정적 경험이든 과거의 경험을 껴안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살아온 흔적인 경험을 하나님 그의 목적을 위해 나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데 그 경험들을 사용하시도록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 절망에 한 경험이지만, 그 경험까지도 나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Innovat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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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d,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배우다사도 요한이 편지를 보낸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매우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편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이가 이르시되" (계3:14) 여기서 예수님은 '아멘' 이시요 '충성' 되고 '참된 중인으로 묘사됩니다. '아멘'과 '충성'과 '참된'으로 표현된 단어는 모두 '신실하다. 확실하다'는 의미로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이로 볼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가 지닌 문제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실함' 과 '확실함' 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무너진 교회는 이와 같은 모습을 잃어버리고, 무능하고 실패한 증인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다시 '아멘'과 '충성'과 '참 중인' 된 삶을 살아내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모습은 '창조의 근본'으로 표현됩니다. 부활은 새 창조의 근본입니다. 사데 교회는 거의 혼수상태라고 평가되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몇몇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남은 자에 대한 언급도 없고 칭찬도 전혀 없습니다. 부활이 주는 새 창조의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처럼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살리기 위해 신실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엄중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책망만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3:17) 라오디게아는 어려움을 몰랐던 교회입니다. 성경에는 그 어떤 핍박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유대인 회당이나 주변 사회로부터 위협받은 바도 없습니다. 발람, 니골라당, 이세벨과 같이 이상한 사상을 전파한 거짓 선지자에 대한 언급도 나오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다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였고,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책망만 들어야 했습니까?왜냐하면 그들은 부요함이라는 달콤함에 취해 영적 환각 상태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경제가 호황을 이루고,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적으로는 부유했을지 모르나 영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믿음의 시력을 상실한 영적 맹인이었습니다. 가짜 부요함에 취해 진짜 부요함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3:15~16)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가짜 풍요를 진짜 풍요로 착각하여 미지근한 신앙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는 '무능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경건의 모양만 갖출 뿐 어떠한 경건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임할 최대의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를 대가로 지급하여 세우신 몸된 교회를 용납할 수 없으니 토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버림을 당하는 일이며, 관계의 단절이요. 구원에서 영원히 제외되는 결과를 의미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떻게 해야 영적 무지와 자만에서 깨어나 다시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1) '영적 빈곤' 에서 탈출해야 합니다.영적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3:18) ①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이것은 '정결한 삶'을 의미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불 속에서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한 순금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적인 것으로 많이 오염 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들의 믿음을 다시 정결케 하기 위해 성령의 불 속으로 들어가 단련하여 모든 불순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순수한 믿음을 주님에게서 새롭게 받도록 해야 합니다. ② 흰 옷을 사라이것은 '영적 단정함'을 의미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검은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합니다. 최고급 모직물로 된 검은 옷은 부와 사치의 상징이었습니다.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입은 그들의 옷은 주님의 눈에는 벌거벗은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벌거벗은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자신들의 모습을 교만하게 자랑한 것입니다. 자아 성찰이 없는 인간과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흰 옷을 사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입고 있는 사치스러운 검은 옷을 과감히 벗어 던져버리고, 주님이 지정하신 '흰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서는 '흰 옷'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옳은 행실이 수반된 '영적 단정함' 이 갖추어야 합니다. ③ 안약을 사라이것은 '영적 시력'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을 상실하면서 영적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선악에 대한 분별이 흐려졌고,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약'이 필요합니다. '안약을 발라 보라'는 명령에서 '발라'에 해당하는 단어는 '성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어두운 눈이 치료되고 밝히 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영적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시력'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처방은 '쇼핑' 이었습니다. 장사에 능하고 다양한 산업에 익숙해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다른 데서 사지 말고, 주님으로부터 금을 사고, 흰 옷을 사고, 안약을 사라고 명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족한 것 없는 부자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잃으면 다 잃은 것임을 깨닫는 길밖에 답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만큼은 결코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다시 돌이키는 길이 그들에게 필요했습니다. 2) '열정 빈곤'에서 탈출해야 합니다.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를 세워나갈 때의 열정을 잃어버렸습니다. 골로새 교회와 바울의 편지를 돌려 읽으며 신앙의 본질을 찾아가던 한때의 열정도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수동적이며, 성령의 일들에 무기력하고, 사역에 무능하며, 주님을 따르는 일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명령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느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3:19)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다시 열심을 내어 노력할 것을 권면하십니다. '열심'은 사전적 의미로 '어떤 일에 대해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열심' 입니까?요즘 용인의 한 놀이동산에서 판다월드가 가장 유명하다고 합니다. 이곳에 '강바오' 라는 별명을 가진 사육사가 계십니다. 그분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철원 사육사는 스무 살에 자연농원에 입사했습니다. 입사 후 얼마 안 되었을 때, 맹수의 새끼를 인공 포육하는 데 자원했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정으로 마음을 다하여 3시간 간격으로 우유를 먹여야 하는 고단한 일을 마다않고 지극 정성으로 돌봤습니다. 그리하여 최초로 맹수의 인공 포육에 성공했습니다. 또한 우리 나라에 온 판다 부부가 자연 임신을 하고 새끼를 낳게 되었을 때, 출산일이 임박하자 간이침대를 우리 옆에 두고 잘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돌봤습니다. 그래서 또 국내 최초로 판다의 인공 포육을 성공시켰습니다. 강철원 사육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열렬한 애정으로 집중한 진정한 열정가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열정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다시 열심을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열정의 방향도 중요합니다. 나의 부요를 위해, 나의 탐욕을 위해 열성을 품는다면 이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12:11)고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어떤 문제도 없고 핍박도 없이 풍요롭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러한 부요함이 오히려 우리에게 영적 빈곤을 가져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영적으로 빈곤해지는 상황에서 탈출하여 영적 부요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으로 부요하려면,'정결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옳은 행실이 함께 하는 '영적 단정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영적 빈곤과 함께 열정 빈곤으로부터 탈피하여야 영적 부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을 발판삼아 영적 빈곤에서 벗어나 영적 부요를 이룩하고자 정진하는 영은교회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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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담 탈출기험담은 사전적으로 '남의 흠을 들추어 헐뜸음. 또는 그런 말'을 뜻합니다. 즉 그 자리에 없는 어떤 사람의 흠을 들추어 헐뜯는 것을 말합니다. 신문사 칼럼 중 독보적인 기록을 보유한 '이규태 코너'가 있습니다. 이규태 씨는 23년 동안 6,702회분을 기고하며 대한민국 언론사상 최장기 칼럼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는 『한국인, 이래서 못산다』는 책에서 '험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인에게 보편성을 지닌 인간 갈등의 자체 해소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나름의 그 해소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갈등을 있게 한 상대방이 없을 때 그 사람을 헐뜯어 말할 수 있는 험담이 아닌가 싶다. 험담을 실컷 하고 나면 화도 다소 풀리고 긴장도 느긋해지며 기분도 좋아진다. 이러한 험담은 한국인의 한국인다운 특징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험담을 합니다. 험담하는 동안 마음에 쌓인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맞장구 쳐 주는 사람 덕분에 끈끈한 유대감을 느끼며, 또 험담의 대상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험담의 대상이 된 사람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둘만 아는 비밀로 시작했던 험담은 또 다른 험담을 그리고 또 다른 험담을 재생산하며 공공연한 비밀이 됩니다. 처음 험담을 시작한 사람은 일시적으로는 스트레스를 해소했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언젠가 누군가도 내 험담을 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험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는 자신에 대해서 인정해 달라는 욕심이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내가 그보다 더 뛰어나고 소중한데,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더 노력하고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기보다 상대방을 깎아 내리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험담으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상대방의 약점을 홍보하고, 상대방의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자신을 높이는 반사 이익을 얻으려 합니다. 이러한 험담 때문에 친밀했던 관계가 단번에 틀어지기도 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 일도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도 험담 때문에 공동체에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매우 사랑하는 자인 가이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요삼1:1)" 요한은 가이오가 형제 곧 나그네 된 사람들에게 행한 것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요삼1:5)" 여기서 '나그네 된 사람들'은 요한과 같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다른 교회를 방문하거나 선교 여행을 하는 복음전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가이오는 이러한 복음 전도자들을 정성껏 대접하였고, 성실히 섬기면서 선교를 도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이오가 소속되어 있는 교회에 그와는 전혀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요삼1:9) 성경은 디오드레베에 대해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공동체 안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킨 듯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도들이 순교한 이후 교회의 사역을 이끌어갈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장로와 감독이 사도의 자리를 대신해 각 지역 교회의 대표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이면서 장로인 요한은 지역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디오드레베가 이러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야심을 품었습니다.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그는 자신이 그 지역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사도 요한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하고 자신이 맡은 직임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합니다. 디오드레베로 인해 교회 안에 정치적인 다툼이 일어납니다. 교회가 가이오의 편과 디오드레베의 편으로 나뉘면서 교회다움을 잃어갑니다. 이러한 문제를 일으킨 디오드레베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요1:10) 디오드레베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험담을 합니다. 가이오 편과 디오드레베 편으로 나뉘어 이런 저런 문제로 어수선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으뜸이 되기 위해 자신을 높이고 상대방을 낮추는 강한 조치를 시도합니다. 그는 그동안 교회 공동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요한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험담을 선택합니다. 디오드레베가 어떠한 내용으로 험담을 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그는 '악한 말'을 일삼습니다. 그러나 험담으로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았다고 합니다. 디오드레베의 악한 행동은 세 가지였습니다. 먼저'복음 전도단을 맞이하지 않는 것' 입니다. 이는 요한의 부탁을 거절함으로써 요한의 권위를 부정하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둘째는 '금하는 것' 입니다. 그는 가이오의 편에 서서 요한의 부탁을 수용하는 사람들, 즉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방해하고 협박했습니다. '금하여' 라는 단어는 문법적으로 반복되는 동작을 나타냅니다. 한두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방해 공작을 펼친 것입니다. 셋째는 '내쫓는 것' 입니다. 디오드레베는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냅니다. 이렇게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악한 말로 혐담하여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교회가 교회다움을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한 사람의 험담으로 인해 교회는 큰 혼란에 빠지고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 험담 탈출기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 사람의 험담으로 시작된 교회의 혼란에 대한 처방을 내립니다. 그의 처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 본받지 말라!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요삼1:11) 여기서 '악한 것'은 디오드레베의 악한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험담을 일삼았던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악에 악을 더해 핍박했던 것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 나에게 험담을 늘어 놓으면, 자기도 그 사람에 대해 험담하고 싶고, 흠집을 내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만일 가이오의 편에서 있는 사람들이 디오드레베가 했던 것처럼 상대방을 흠집내고, 험담을 늘어놓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자신들이 핍박받은 만큼 상대방에게 되갚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것이 과연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모습일까요?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악한 것을 본받지 말라고 명령한 것은 사람의 본성대로 되갚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② 본받으라!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요1:11) 사도 요한은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다(요삼1:11)고 기록합니다. 바꿔 말하면, 선한 것은 하나님께 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7)에서 보듯이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의 별명이 '사랑의 사도' 라고 불리울 정도로 그는 서신서에서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특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하는 '선한 것'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험담으로 인해 시작된 교회의 혼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선한 것, 즉 사랑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들의 악행을 흉내내지 않고,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을 따르는 것이 궁극적인 승리라고 강조합니다. ■ 적용 누군가가 여러분을 험담하여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의 악한 것을 따라 그가 했던 방법대로 그를 험담하여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 공동체 안에서 험담하여 내가 맺고 있는 관계 를 어렵게 만든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의 악한 것을 따라 그가 했던 방법대로 그를 험담하여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게 만들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험담 때문에 우리는 마음이 상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험담 때문에 사람이 미워지고, 심지어 믿음의 공동체가 깨어지기도 합니다. 험담 때문에 아무리 마음이 상하고 힘들지라도 상대방의 악한 것을 본받지 말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속한 선한 것, 사랑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입을 선한 것을 위해 만드셨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4:29) 하나님께서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선한 말을 하고, 은혜를 끼치는 일에 사용하도록 우리의 입을 만드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에 귀하게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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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세우기■ 소그룹의 중요성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지나면서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온 감정 가운데 하나가 ‘외로움’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다른 사람과의 물리적 만남을 피하는 ‘비대면 문화’가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행은 물론이고 집 밖에서의 모임 또한 어려웠습니다. 회식도 비규범적인 일로 여겨지고 직장에서도 재택근무가 늘어났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어느 정도 반강제적 속성을 띠면서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본성과 무관하게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습니다. 자연히 활동의 제약과 소통의 결핍으로 인해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해 어느 리서치회사에서 천 명을 대상으로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외로움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절반 이상인 55%가 “외로움을 느낀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의 수준’에 대해 88%가 ‘사회 전반적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동향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개인의 특성과 취향을 존중하고 동질성을 확보한 소그룹 형태의 모임은 굉장히 활성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 모임은 매우 연대가 강화돼 있습니다. 동호회와 같은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도 잘 모입니다. 분명히 사회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지나면서 파편화 현상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동질적인 생각을 갖고 있거나, 공감대를 형성한 사람들은 스스로 모였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무리 위험해도 정말 친한 사람들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만남을 지속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결국 친밀한 동질적 그룹에 대한 중요성이 오히려 부가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그룹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 교회는 어떠합니까? 현장 예배 참석률 저하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단지 숫자의 감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신앙 저하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특히 3040세대의 현장 예배 참석률 저하로 인한 다음 세대의 신앙 약화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교회 사역 전체의 역동성 상실과 하향 평준화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안에서도 소그룹의 중요성이 대두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이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절) 예루살렘 교회는 ‘예배로 모이는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소그룹으로 모이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였으며, 하나 된 마음으로 공동체가 추구하는 비전을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사도들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사모하였으며, 그 말씀을 듣기 위해 날마다 성전에 모였습니다.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의 예배에는 기쁨이 넘쳐났으며 감사의 고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는 ‘집에서’ 소그룹 모임을 가졌습니다. 여기서 ‘집에서’로 번역된 단어는 ‘집집이 돌아가면서’ 또는 ‘이 집 저 집에서’ 떡을 떼며 음식을 함께 먹으며 모임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즉 구역 예배와 같은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들의 모임은 인간 중심의 교제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가족 상호간의 모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소그룹 모임에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모임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 중심의 모임이었습니다. 또한 모임 가운데 훈련과 교제가 있었으며 공동체의 성장을 이끌어 갔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섬김과 봉사의 장으로 지경을 넓혀갔습니다. ■ 소그룹 세우기 우리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소그룹이 온전히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현재까지 세 분야에서 소그룹이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먼저, 다양한 사역 소그룹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내에서 같은 영역에서 봉사하는 성도들끼리의 소그룹입니다. 예를 들면 교육부서를 섬기는 교사들의 소그룹이 있습니다. 함께 사역하는 교사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모이며, 소그룹 안에서 말씀이 중심되고, 기도가 삶이 되어 서로의 성장을 돕고, 누군가를 섬기는 소그룹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다음은 새가족을 위한 소그룹입니다. 올해 집중하고 있는 목표 가운데 하나가 새가족을 온전히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새가족의 정착을 돕기 위해 올해부터 6교구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6교구는 새가족으로 등록한 분들이 하나의 교구를 만들어가는 제도입니다. 6교구는 구역 편성이 기존의 지역 중심에서 벗어나 비슷한 연령대로 이뤄지는 특성을 갖습니다. 새로운 공동체에 적응하기 힘든 새가족이 비슷한 연령의 성도들과 같은 소그룹 안에서 서로를 세워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비슷한 문화를 갖고 있는 성도들이 같은 소그룹 안에서 깊은 나눔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소그룹을 통해 소속감을 갖게 해 줘 새가족이 교회에 좀더 정착을 잘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또한 올해부터 담임목사와 함께하는 ‘올백 구역 예배’를 통해 ‘구역 소그룹’을 다시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멈췄던 구역 소그룹 모임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새롭게 소그룹 모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구역 예배의 새로운 틀을 제시하고, 앞으로 꾸준한 모임을 통해 구역이 부흥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다양한 소그룹을 온전히 세워가기 위해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을 예루살렘 교회에서 배웁니다. 소그룹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함으로써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에 따라 변화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해가는 놀라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모임입니다. 또한 개인의 성장에만 멈추지 않고 섬김과 나눔과 봉사가 일어나는 모임입니다. 이와 같은 소그룹 모임을 통해 서로를 돌아보고, 중보하며, 하나된 공동체가 되기 위해 힘쓰는 영은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웃에게 호감을 사는 영은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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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d, 다음 세대와 더불어!■ 오늘날의 다음 세대 어느 기독교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월간지에 다음 세대의 신앙 형성에 관해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다음 세대의 신앙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그동안 신앙 교육을 위해 다양한 신앙 전수 방법과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실천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 신앙의 위기 지표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신앙 전수’의 문제라기보다 ‘신앙 형성’ 자체가 안 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글쓴이는 다음 세대의 신앙 형성 자체가 어려워진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먼저 다음 세대의 관심 영역이 매우 좁아졌다고 합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들판, 산, 하늘을 보면서 지냈습니다. 재미있는 놀거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멍하니 너른 들판, 겹겹이 솟아 있는 먼 산, 텅 빈 하늘을 바라보면서 지루한 시간을 견뎠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에는 넓고 크고 깊은 자연의 세계가 각인되었습니다. 단조롭지만 광대하고 깊은 심상이 아이들의 내면세계에 자리잡고 심성의 틀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학원, 공부방 안에서 보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아이들의 관심 영역은 점점 좁아지고, 특히 ‘신앙 형성’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또한, 다음 세대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매우 강합니다. 다음 세대의 필수품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인 컴퓨터나 핸드폰은 주변에 관심을 갖기보다 손 안에 있는 세계에 집중할 것을 요구합니다. 작고 복잡한 놀거리로 꽉 차 있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어플은 아이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고 즉흥적인 반응을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혼자 놀기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자기 이익이 침해되는 것에 매우 민감하며, 자신의 취향을 절대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는 강한 개인주의 성향을 보입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다음 세대가 신앙을 잘 형성할 수 있을까요? ■ ‘신앙 형성’을 위한 두 가지 먼저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그들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시84:4) 다음 세대들이 있어야 할 곳이 ‘주의 집’ 즉, ‘성전’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과거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이사할 때 반드시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와의 거리’였습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이 커서 가급적 교회 근처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자녀교육, 주거환경, 부동산 가치 등이 이사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삶의 경계’를 ‘성전과 연관’시켜야 합니다. 주의 성전을 멀리 떠나지 않으려는 마음, 성전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정신’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공간적 의미를 넘어 ‘삶’이 ‘성전 중심’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의 신앙 형성을 도울 수 있는 ‘가족 하브루타’ 대화법을 소개합니다. ‘가족 하브루타’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고, 그것을 이번 한 주간 어떻게 실천하며 살 것인지에 대해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주일 저녁에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시간을 선정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먼저 어떤 말씀을 들었는지,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 나눕니다. 이어서 자녀가 교회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합니다. 이때 자녀들의 지식적 앎을 점검하기보다 배운 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적용할 것인지 표현하고 구체화하도록 대화를 통해 이끌어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자녀들이 스스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생각하도록 이끌어 주며 그 과정을 모니터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녀들의 일상이 늘 주의 집에 사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84:4) 다음 세대에게 ‘항상 주를 찬송’하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는 삶의 중심이 예배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예배보다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앞에서 예로 든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하루종일 다양한 재미를 누릴 수 있는 세상입니다. 심지어 예배 시간에도 스마트폰으로 예배의 지루함을 견디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다음 세대는 점점 예배 중심의 삶보다 재미 중심의 삶을 추구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재미’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이 있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항상 주를 찬송하는 자’로서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교훈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훈계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삶 속에서 신앙적 본을 보이는 ‘모델링’ 교육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매순간 말, 감정, 행동의 본이 됩니다. 자녀는 부모를 보며 자라기에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삶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자녀도 자연스럽게 부모가 걸어갔던 신앙의 길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자녀의 신앙을 형성하는 데 부모가 자녀 앞에서 신실한 신앙의 본을 보이는 것보다 확실한 교육은 없습니다. 우리는 부모 세대로서 다음 세대의 신앙 형성을 위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 두 가지를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가 모델이 되어 ‘성전 중심의 삶’, ‘예배 중심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을 잘 형성한 다음 세대에게는 어떤 약속이 있습니까?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5) 시온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곳,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대로’는 하나님과 관계가 막힘 없이 훤하게 뚫린 고속도로와 같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잘 형성된 다음 세대는 시온의 대로를 만들 수 있도록 주께서 힘을 주신다는 약속을 갖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시84:6) 인생은 언제나 평탄한 길만 걸을 수 없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있고, 눈물과 슬픔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광야를 지나는 삶 가운데 ‘반석에서 샘물’이 솟는 기적이 일어나며, 하나님께서 은혜의 샘과 생각지 않는 위로와 보살핌을 베풀어 주신다고 합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7) 또한 하나님은 성도에게 한 번만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지치고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일어설 힘을 주시며, 걸어갈 길을 끝까지 다 걸어가도록 힘을 주십니다. 홍수 때부터 왕으로 좌정하신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하시며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십니다(시29:10-11). 넘어질 일이 생겨도, 주저앉더라도, 다시 힘을 내서 걸어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힘을 주십니다. ■ 신앙 전수보다 신앙 형성 그동안 부모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것에 주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 전수보다 ‘신앙 형성’ 자체가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의 신앙 형성을 위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서 ‘성전 중심’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다음 세대의 신앙 형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예배 중심’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복의 통로인 시온의 대로를 열어 주십니다. 또한 삶 가운데 많은 위로를 더하실 것을 약속하셨고, 성도에게 계속해서 힘을 주신다고 굳게 약속하셨습니다. 다음 세대의 신앙이 온전히 형성되어야 우리의 가정과 교회도 비로소 설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함께 우리 가정과 교회를 온전히 세워 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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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라선한 목자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희생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팔레스타인의 유목민들에게 있어 목자와 양의 관계는 실로 생명적 결탁의 관계였습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위하여 ‘양의 우리’를 준비합니다. 이동 시에는 목자와 양이 함께 들판에서 야숙을 하는 임시 우리를 만듭니다. 어떤 경우는 돌로 벽을 쌓아 양들을 보호하는 요새를 만들고, 비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지붕을 덮었습니다. 아침이면 목자는 문 곁에 서서 양의 수를 헤아려 점검하고, 저녁이 되어 우리로 돌아와서는 다시 문 곁에 서서 양의 수를 한 마리 한 마리 확인합니다. 수가 모자랄 때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찾아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이러한 돌봄은 직업의식만으로는 어려운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자신의 위험이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아픈 양, 병든 양, 잃어버린 양만 생각합니다. 목자는 자신의 일하는 시간, 땀 흘린 노동의 대가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목자의 관심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의 우리에 있고, 그의 전 삶의 재능과 힘이 양의 목장에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희생적 사랑으로 양들을 돌봅니다. 이런 선한 목자는 삯꾼과 대조됩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10:12)” 품꾼의 관심은 오직 자신이 받아야 할 품삯에 있습니다. 품꾼은 양을 잃어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이리떼가 공격하면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양들을 두고 홀로 도망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들의 안전을 위해 이리떼와 끝까지 싸우고 때로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양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남원이 낳은 유명한 화가 김병종은 『바보 예수』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그림에 늘 한 방울의 눈물을 그립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다른 어떤 신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뿐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며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김병종 화백은 우리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가리켜서 ‘바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지나치게 똑똑합니다. 계산적이어서 이것저것 따지는 게 많습니다. 조건을 보고 사랑하고, 보상이 있어야 희생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섬김과 헌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을 지내면서 이 땅에 선한 목자로 오셔서 바보와 같이 사셨던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갑시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우리 또한 바보 같은 사랑과 섬김과 헌신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② 선한 목자의 또 하나의 특징은 친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요10:14-15) 여기서의 ‘앎’은 양의 이름은 물론 양의 특징과 형편을 잘 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관계의 모델이 바로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의 관계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아들의 순종이었듯이, 목숨을 버린 목자의 사랑과 목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가는 양의 순종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7-18)”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결코 대적자들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8장에는 예수님이 잡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죽음의 키스가 필요 없을 만큼 분명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체포를 스스로 요구하며 대신 자기 양들인 제자들을 놓아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계명인 줄 알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죽음의 고난을 당하기로 하신 예수님의 순종을 기뻐하시고 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권한임을 선포하십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10:18)” ‘권세’는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신적 권세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목숨을 버립니다. 권세가 없어서가 아니라 버릴 권세와 다시 얻을 권세가 모두 예수님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사역이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있지만, 철저히 자발적 선택을 통한 순종임을 강조합니다. 표면적으로 그의 죽음은 종교지도자들이 잡아 죽인 결과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선택하고 그 길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버릴 권세인 십자가와 다신 얻을 권세인 부활을 통해 현재 자기를 믿는 사람들과 이후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를 통해 풍성한 삶을 주는 선한 목자이심을 선포합니다. 우리를 위해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해스스로 제물이 되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의 사랑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복음에 합당한 삶은 양인 우리가 목자의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물이 되려면, 이 세대를 본받지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주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달리 번역하면, ‘합당한’입니다. 외면적이고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 감사, 순종, 경배, 그리고 예수님의 존재와 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험이 결합된 삶이 합당한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을 지내면서 선한 목자로 이 땅에 오셔서 자발적으로 순종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갑시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복음에 합당한 예배자로 살아갑시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원하여 십자가 형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고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나음을 입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한 목자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선한 목자로 이 땅에 오셔서 바보와 같이 사셨던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 자발적으로 순종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예배자로 온전히 세워져 나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