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준아, 내가 예수다!”

“승준아, 내가 예수다!”

인터뷰&글: 김명희 기자

  • 등록 2026.01.12 14:18
  • 조회수 1,641

20260112_141614_1.jpg

 

1221일 주일 예배를 마치고 홍보부실에서 이승준 은퇴장로님을 만났다. 비전센터 건축 후 4층 홍보부실 방문은 처음이라는 장로님에게 영은교회는 삶의 첫 교회이자 전부다. 장로님은 마흔이 다돼서 교회를 처음 찾았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는 삶의 연륜만큼이나 뜨겁다.

 

어머니의 불심으로 자라다

 

이승준 장로님은 194212,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장로님이 태어날 당시 어머니는 신실한 불교 신자였다. 16녀를 낳으신 어머니에게 장로님은 하나뿐인 귀한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불심(佛心)으로 키웠다. 방학 때마다 어머니는 아들을 절에 보내서 12일간 머물며 불공을 드리게 했다. 불공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이어졌다. 당시 가족 중 둘째 누나만 유일하게 교회를 다녔다. 누나는 서울대 음대를 다니면서 혜화동에서 자취했고, 그때 영락교회를 다녔다. 장로님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누나가 있는 서울로 유학 와 함께 지냈지만, 교회에 가지 않고 방학이면 영월에 있는 사찰에 가 불공을 드렸다. 이 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됐다.

 

영은교회 교인이 되다

 

대학을 마치고 장로님은 회사에 입사했다. 양평동에 있는 덕부회사에 다니면서 아내 홍수자 권사를 만나 결혼했다. 권사님 가족은 모두가 유아세례 기독교인이었고, 장모님과 처제는 영은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이후 덕부회사에서 울산으로 내려가 덕양산업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다. 원래 신앙인이었던 홍 권사는 불교 신자인 시어머니의 반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1981, 회사 일로 서울로 오게 되었는데 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로님은 홍 권사와 장모님, 처제의 권유로 마침내 영은교회에 등록하게 됐다. 19815월에 영은교회에서 생애 첫 예배를 드렸다.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지만,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분이 내킬 때만 교회에 오는 말로만 교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을 전적으로 만나게 됐다.

 

승준아, 내가 예수다

 

198664, 출장차 일본에 갔다가 오는 길이었는데 엉덩이 주변이 몹시 아팠다. 허리 통증이 심해서 걸을 수 없었다. 5~6일을 집에서 쉬었으나 차도가 없어 세브란스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 진료 후 즉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이 잘 되었다는 말에 안심하며 화곡동 집에서 출근을 준비했다. 그런데 수술 부위가 악화가 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만 했다.

 

집에 돌아온 장로님은 요양하며 목사님의 설교집과 간증집 테이프를 매일 들었다. 성경도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내가 잘 못 살았구나. 내가 신학대학에 가야겠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홍 권사의 만류로 신학대학의 꿈은 접어야 했다. 그해 6월부터 12월까지 6개월간 허리 통증은 계속 이어졌다. 그동안에 장로님은 성경을 통독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요한계시록을 다 읽고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승준아! 승준아!”하는 음성을 들었다. “누구세요?”라고 묻자 내가 예수다! 내가 네 허리를 고쳐 주겠다.”라고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말씀을 주셨다. 다시, “허리를 돌려라!”라는 음성과 함께 빛을 비춰 주셨다. 이후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자 하얀 염증이 발견됐다. 그동안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치료를 못 받고 통증에 시달려야 했는데, 통증의 원인이 염증임을 알게 됐다. 의사는 항생제를 처방해 주었고 이후 통증은 깨끗이 사라졌다.

 

감동의 시간이었던 고등부 15

 

장로님은 생각했다. ‘믿음이 없는 나에게 성경도 읽게 하시고 승준아! 승준아! 내가 예수다!”라는 음성을 듣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증거 해야 한다.’ 그러나 회사 생활을 하며 시간이 흐르자 다시 세상일에 빠져 살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로님과 일행이 탄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하며 대형 교통사고가 났다. 장로님 옆좌석에 있던 사람은 죽고 장로님은 갈비뼈와 골반이 부러졌다. 그때 장로님은 깨달았다. “내가 바뀌어야 한다!” 건강이 회복된 장로님은 교회 성경공부반인 김영한 목사님의 인물성서반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했다. 종강하자 목사님은 장로님에게 교회에서 봉사했으면 좋겠다고 권유했다. 그리고 즉시 장로님을 고등부 교사로 임명했다.

 

교회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교사로 임명했어요.”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장로님은 당시 고등부 교사들이 한 달에 한 번 기도원에 갔는데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기도원에서의 기도와 예배가 은혜였고, 교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재밌었다. 이렇게 시작한 고등부에서 장로님은 교사로서 아이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헌신했다. 학생들과 함께 고등부에서 믿음이 자랐다. 주일 새벽기도회도 열심히 섬겼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학생들에게 줄 김밥과 간식을 준비했다. 고등부 전도사님들이 장로님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했다.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그분들의 기도가 나를 신앙인으로 키우고 은혜받게 했습니다.” 마침내 장로님은 서리집사로서 고등부 부장직을 맡게 됐다. 고등부에서 보낸 15년은 장로님에게는 교사와 부장으로서 봉사하며, 장로로 임직받기까지 은혜의 시간이었다. 그때 함께 했던 학생들은 지금은 교회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고, 전도사님들은 목사가 되어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장로님에게 고등부 시절은 한 마디로 감동의 시간이었다.

 

20260112_141814_1.jpg

 

네 집을 바쳐라

 

이승준 장로님은 1996512일에 안수집사가 됐고, 2003427일에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장로가 된 후에는 선교분과, 재정부장, 혼례부장, 교육3부 부장 등 다양한 교회 부서에서 활동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순간은 교회 50주년 희년기념으로 교회가 종현덕 목사님을 말레이시아에 선교사로 파송했고, 그때 종 목사님과 함께 선교 현장에 갔던 일이다.

 

현재 교회 본당 건축을 마친 후 헌당식과 관련해 어려웠던 상황도 잊지 못한다. 허남기 목사님은 교회건축 후 헌당식을 하고자 했으나, 교회 건축 빚 때문에 헌당식을 할 수 없었다. 김창경 장로님은 빚을 갚기 전에는 헌당식을 할 수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당회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며 논의했다. 이승준 장로님도 주님! 내가 감당하고 싶습니다!”라며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네 집을 바쳐라. 그 대신 한없이 네게 복을 주겠다.”

 

기도를 마친 후 장로님은 고민이 됐다. 그 주 토요일에 연말 당회가 있었는데, 당회에 앞서 김춘근 장로님이 이승준 장로님을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헌당식 안을 낼 테니 장로님이 이 안에 찬성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두 장로님은 우리가 집을 바치자!”라고 다짐했다. 당회가 열렸다. 모두가 집을 바치자고 했다. 그러나 은행에서 담보로 잡은 집은 김춘근 장로님과 이승준 장로님 집이었다. 이 두 집을 담보로 은행은 교회 건축 빚을 두 장로님에게 넘겼다. 이후 교인들의 헌금으로 빚을 다 갚고 헌당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장로님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하나님은 철저한 분이셨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우리를 철저히 헌신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83세의 이승준 장로님은 지금은 눈도 허리도 약하지만,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증인된 삶이 기쁘다. 우리 교회가 믿음의 증인을 많이 세워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해내기를 바란다. 장로님 평생에 여섯 번이나 주님이 부르셨는데, 부르심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장로님은 그 부르심에 맞게 증인된 삶을 살지 못해 후회된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노구의 장로님은 오늘도 주님의 음성을 믿으며 힘차게 신앙의 길을 걷고 있다. “네가 내 뜻에 합한 삶을 살면 내가 눈을 뜨게 해주겠다!” “그렇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 한쪽 눈이 실명된 장로님은 마태복음의 말씀을 반복해서 읽으며 매일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