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이 편지를 보낸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매우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편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이가 이르시되" (계3:14)
여기서 예수님은 '아멘' 이시요 '충성' 되고 '참된 중인으로 묘사됩니다. '아멘'과 '충성'과 '참된'으로 표현된 단어는 모두 '신실하다. 확실하다'는 의미로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이로 볼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가 지닌 문제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실함' 과 '확실함' 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무너진 교회는 이와 같은 모습을 잃어버리고, 무능하고 실패한 증인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다시 '아멘'과 '충성'과 '참 중인' 된 삶을 살아내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모습은 '창조의 근본'으로 표현됩니다. 부활은 새 창조의 근본입니다. 사데 교회는 거의 혼수상태라고 평가되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몇몇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남은 자에 대한 언급도 없고 칭찬도 전혀 없습니다. 부활이 주는 새 창조의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처럼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살리기 위해 신실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엄중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책망만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3:17)
라오디게아는 어려움을 몰랐던 교회입니다. 성경에는 그 어떤 핍박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유대인 회당이나 주변 사회로부터 위협받은 바도 없습니다. 발람, 니골라당, 이세벨과 같이 이상한 사상을 전파한 거짓 선지자에 대한 언급도 나오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다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였고,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책망만 들어야 했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부요함이라는 달콤함에 취해 영적 환각 상태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경제가 호황을 이루고,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적으로는 부유했을지 모르나 영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믿음의 시력을 상실한 영적 맹인이었습니다. 가짜 부요함에 취해 진짜 부요함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3:15~16)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가짜 풍요를 진짜 풍요로 착각하여 미지근한 신앙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는 '무능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경건의 모양만 갖출 뿐 어떠한 경건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임할 최대의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를 대가로 지급하여 세우신 몸된 교회를 용납할 수 없으니 토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버림을 당하는 일이며, 관계의 단절이요. 구원에서 영원히 제외되는 결과를 의미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떻게 해야 영적 무지와 자만에서 깨어나 다시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1) '영적 빈곤' 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영적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3:18)
①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이것은 '정결한 삶'을 의미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불 속에서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한 순금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적인 것으로 많이 오염 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들의 믿음을 다시 정결케 하기 위해 성령의 불 속으로 들어가 단련하여 모든 불순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순수한 믿음을 주님에게서 새롭게 받도록 해야 합니다.
② 흰 옷을 사라
이것은 '영적 단정함'을 의미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검은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합니다. 최고급 모직물로 된 검은 옷은 부와 사치의 상징이었습니다.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입은 그들의 옷은 주님의 눈에는 벌거벗은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벌거벗은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자신들의 모습을 교만하게 자랑한 것입니다. 자아 성찰이 없는 인간과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흰 옷을 사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입고 있는 사치스러운 검은 옷을 과감히 벗어 던져버리고, 주님이 지정하신 '흰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서는 '흰 옷'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옳은 행실이 수반된 '영적 단정함' 이 갖추어야 합니다.
③ 안약을 사라
이것은 '영적 시력'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을 상실하면서 영적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선악에 대한 분별이 흐려졌고,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약'이 필요합니다. '안약을 발라 보라'는 명령에서 '발라'에 해당하는 단어는 '성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어두운 눈이 치료되고 밝히 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영적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시력'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처방은 '쇼핑' 이었습니다. 장사에 능하고 다양한 산업에 익숙해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다른 데서 사지 말고, 주님으로부터 금을 사고, 흰 옷을 사고, 안약을 사라고 명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족한 것 없는 부자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잃으면 다 잃은 것임을 깨닫는 길밖에 답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만큼은 결코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다시 돌이키는 길이 그들에게 필요했습니다.
2) '열정 빈곤'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를 세워나갈 때의 열정을 잃어버렸습니다. 골로새 교회와 바울의 편지를 돌려 읽으며 신앙의 본질을 찾아가던 한때의 열정도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수동적이며, 성령의 일들에 무기력하고, 사역에 무능하며, 주님을 따르는 일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명령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느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3:19)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다시 열심을 내어 노력할 것을 권면하십니다. '열심'은 사전적 의미로 '어떤 일에 대해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열심' 입니까?
요즘 용인의 한 놀이동산에서 판다월드가 가장 유명하다고 합니다. 이곳에 '강바오' 라는 별명을 가진 사육사가 계십니다. 그분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철원 사육사는 스무 살에 자연농원에 입사했습니다. 입사 후 얼마 안 되었을 때, 맹수의 새끼를 인공 포육하는 데 자원했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정으로 마음을 다하여 3시간 간격으로 우유를 먹여야 하는 고단한 일을 마다않고 지극 정성으로 돌봤습니다. 그리하여 최초로 맹수의 인공 포육에 성공했습니다. 또한 우리 나라에 온 판다 부부가 자연 임신을 하고 새끼를 낳게 되었을 때, 출산일이 임박하자 간이침대를 우리 옆에 두고 잘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돌봤습니다. 그래서 또 국내 최초로 판다의 인공 포육을 성공시켰습니다. 강철원 사육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열렬한 애정으로 집중한 진정한 열정가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열정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다시 열심을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열정의 방향도 중요합니다. 나의 부요를 위해, 나의 탐욕을 위해 열성을 품는다면 이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12:11)고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어떤 문제도 없고 핍박도 없이 풍요롭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러한 부요함이 오히려 우리에게 영적 빈곤을 가져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영적으로 빈곤해지는 상황에서 탈출하여 영적 부요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으로 부요하려면,'정결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옳은 행실이 함께 하는 '영적 단정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영적 빈곤과 함께 열정 빈곤으로부터 탈피하여야 영적 부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을 발판삼아 영적 빈곤에서 벗어나 영적 부요를 이룩하고자 정진하는 영은교회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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