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영은교회 교우들께 주님의 은혜와 평강과 함께 인사를 전합니다. 저는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에서 그르노블 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는 이기정 선교사입니다. 지면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있는 그르노블은 리옹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고 스위스,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의 동남부 지역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입니다. 비록, 소도시 일지라도, 유럽과 아프리카의 IT 허브를 만들겠다는 프랑스 정부의 야심찬 계획 덕분에 IT와 과학과 연관된 다국적 기업들과 연구소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체감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 검색으로 유명한 N사의 AI(인공지능) 연구소도 몇 해 전 이곳에 설립된 것으로 봐선 벌써 허브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일이 있으신가요? 우리들 대부분은 ‘종교개혁’ 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마도 ‘마르틴 루터’를 제일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역시도 프랑스에 와서 하나, 둘씩 알게 되기 전에는 마르틴 루터를 먼저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장로교인으로 서 있는 우리라면, ‘위그노(Huguenot)’라는 말을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오늘은 제가 알게된, '프랑스 교회와 위그노’에 대한 이야기를 교우 여러분들과 조금 나눠보려고 합니다.
■ ‘위그노’ 는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를 일컫는 말이다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자로 떠오르기 전 프랑스에서는 인문주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때 인문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성서에 대한 큰 관심이 일어났습니다. 개혁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모(Meaux)그룹으로 알려진 인문주의자들이 시편과 복음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했습니다. 이런 일을 했던 중심인물 가운데, 에라스무스와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 프랑수아 1세의 누이앙굴렘의 마르그리트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성서와 신학에 관해 쓴 많은 저서를 사람들이 읽게 되었고,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자크 르페브로 데타플은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루터가 수도사 시절에, 그리고 칼뱅1)이 데타플의 성서 해석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아! 중요한 사실. 이렇게 생겨난 프로테스탄트들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Huguenot)’라고 부릅니다.
1) 흔히들 칼빈 혹은 칼뱅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사람은 프랑스 사람이기에 정확한 발음은‘장 깔방(Jean Calvin)’이다)
■ 어려움 속에서 신앙을 지켜낸 위그노들
1555년까지 프랑스에서는 위그노들이 교회를 조직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등장 이후,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 운동이 급속히 퍼졌고 1562년부터는 내전이 잇달아 일어나는 등, 위그노 교도들은 승리와 패배를 번갈아 겪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1572)’이라고 불리는 일이 일어나며 수많은 위그노 교도가 가톨릭교도들로부터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이때 위그노를 이끌던 나바라의 (우리에게 앙리 4세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엔리케가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프랑스 왕이 되면서 잠깐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 일은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만족스러운 일이었고, 앙리 4세는 그 유명한 ‘낭트 칙령’을 공포하여 위그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실제로 보장해 주게 됩니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루이 14세가 왕으로 즉위하며, 낭트 칙령을 폐지했고 위그노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광야 교회 시대’라는 긴 고난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지금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위그노의 ‘광야 박물관(Musee du Desert)’에 가면 당시 위그노들이 어려움 속에서 신앙을 지켜낸 모습에 저절로 숙연해집니다. 이 시기에는 박해를 견디다 못해 25만 명 이상의 위그노 교도들이 독일,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위스,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망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망명한 위그노들의 대부분이 엔지니어와 지식인들이었기에 당시 프랑스 주변국들이 발전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 프랑스 개혁교회의 분열과 연합
반면, 프랑스에 남은 사람들은 숨어서 신앙을 유지하며 박해의 시간을 견뎌냅니다.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때에야 비로소 신앙에대한 권리를 찾을 수 있었기에 무려100년이 넘는 기간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개혁교회는 어렵게 신앙의 자유를 얻어내었음에도, 1848년 이후 정통파와 자유파로 나뉘며 더 이상 연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정통파는 교회의 신앙고백을 엄격히 따르는 반면, 자유파는 개인 양심과자유를 중시하며, 강제적인 신앙고백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20세기 초 프랑스에는 4개의 주요 개혁교회 그룹이 생겨납니다. 1905년 프랑스 정부는 모든 종교 단체들을 국가로부터 분리하는 법을 제정했고, 교회들은 이때부터 정부의 지원 없이 자립해야 했기에 각각의 개혁교회 그룹들이 다시 연합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그 결과 1936년 공동신앙선언을 채택하며, 1938년에 프랑스 개혁교회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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