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나은 의
예수님은 ‘의’에 대해서도 바리새인들과 대립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의’란 율법주의가 낳은 ‘자기 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문자적 의와 전혀 다른‘의’를 강조하시며, 이를 ‘더 나은 의’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예수님은 율법에 철저한 이 바리새인들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체 무슨말씀일까요?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바리새인의 의는 형식적이고 문자적인 의였습니다. 문자로 기록된 율법만 범하지 않으면, 그 속은 어떻든 관계없었습니다. 율법을 준수하되 정의, 긍휼, 믿음과 같은 율법의 기본 정신을 놓친 채 자기 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더 나은 의는 형식이나 문자적인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과 본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율법에서 말하는 살인죄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문구로 대조를 만들며 더 나은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21)
율법에는 ‘살인’과 관련된 계명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민수기 35장 31절에서는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피는 땅을 더럽히(민35:33)’기 때문입니다. 피를 흘림으로 누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앗아갔다면, 그 피는 땅을 더럽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피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살인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앞의 규정을 재확인하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민34:35).”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택한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땅을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피로 더럽히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생명’과 관련된 율법에는 사실 금지 명령보다 ‘생명을 존중하라’는 적극적 행동 명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배우고 가르친 것은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였습니다. 살인하면 재판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의 재판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방 재판소였고, 하나님의 심판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새롭게 해석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라가’는 유대인들의 욕설로 직역하면 ‘헛된 놈’, ‘바보같은 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갖는 모든 편견과 시기, 중상모략, 투기,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 모든 무책임한 말, 음모, 헛소문 퍼뜨리는 것, 수군거리는 것 등 모든 것이 ‘라가’에 포함됩니다. 또 ‘미련한 놈’은 ‘하나님 앞에서 가치 없는 놈’, ‘하나님 앞에서 천벌 받을 놈’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왜 저런 인간을 다 만드셨는가?”라고 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분노하는 것’, ‘라가라고 욕하는 것’,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을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죄의 출발은 자기 마음입니다. 상대를 모욕하는 말을 했다면, 이미 내 속에서 상대를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살인이 우리 마음에서 먼저 일어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살인을 금하는 세상의 법과는 다른 깊은 뜻이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이 살인 행위 자체를 정죄했다면, 예수님의 성취적 가르침은 살인 행위의 심연으로 들어가서 살인 행위를 일어나게 하는 마음의 분노와 그로 말미암은 욕설까지 문제삼습니다. 살인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마음 속에 살의를 품은 것과 그런 마음으로 내뱉는 말들도 살인죄와 동일하다고 하십니다.
요즘은 직접적인 말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간접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인터넷 댓글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모함하고 인격을 모독합니다. 이런 악의적 댓글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정신적, 정서적 살인이 횡행하는데도 ‘나는 살인한 일이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시대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관련하여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쉽게 분노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에게 바보라고 함부로 말했다면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 아래에서 ‘더 나은 의’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살인을 유발하는 그릇된 마음을 다스리는 것까지를 요구합니다. 과연 더 나은 의를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 더 나은 의를 위한 화평
예배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마5:25)
예수님은 예배 드리기 전에 먼저 인간관계에서의 갈등과 미움을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잘못한 일이 있다면 재판정에 가기 전에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사화(私和)’는 법으로 처리할 송사(訟事)를 개인끼리 서로 좋게 풀거나 원수였던 사이가 원한을 풀고 서로 화평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함께 길에 있을 때’는 ‘재판정으로 가기 전에 그 사람과 화해할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용서할 일이 있으면 용서하고, 용서받을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용서를 구하여 갈등을 해소해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 화평한 삶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드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3:15)
갈등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을 구하십시오.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심판관이 되시면 내 욕심을 내려놓고 화평하게 하는 삶을 살 수있습니다.
■ 더 나은 의를 위한 말
야고보서 3장에 보면 우리의 혀가 범하는 범죄에 대하여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약3:6)”고 말씀하십니다. ‘불’은 혀에서 비롯된 엄청난 파괴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혀를 통해 나옵니다. 그래서 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또한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3:8)”고 경고합니다. 날아다니는 새나 바다의 동물이나 심지어 벌레나 곤충도 길들일 수 있지만, 절대 길들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이 쉬지 아니하는 악이 되지 않도록, 누군가를 죽이는 독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나 법의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더나은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노력하는 삶, 말로 살인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Innovat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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