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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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d, 다음 세대와 더불어!■ 오늘날의 다음 세대 어느 기독교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월간지에 다음 세대의 신앙 형성에 관해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다음 세대의 신앙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그동안 신앙 교육을 위해 다양한 신앙 전수 방법과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실천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 신앙의 위기 지표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신앙 전수’의 문제라기보다 ‘신앙 형성’ 자체가 안 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글쓴이는 다음 세대의 신앙 형성 자체가 어려워진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먼저 다음 세대의 관심 영역이 매우 좁아졌다고 합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들판, 산, 하늘을 보면서 지냈습니다. 재미있는 놀거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멍하니 너른 들판, 겹겹이 솟아 있는 먼 산, 텅 빈 하늘을 바라보면서 지루한 시간을 견뎠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에는 넓고 크고 깊은 자연의 세계가 각인되었습니다. 단조롭지만 광대하고 깊은 심상이 아이들의 내면세계에 자리잡고 심성의 틀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학원, 공부방 안에서 보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아이들의 관심 영역은 점점 좁아지고, 특히 ‘신앙 형성’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또한, 다음 세대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매우 강합니다. 다음 세대의 필수품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인 컴퓨터나 핸드폰은 주변에 관심을 갖기보다 손 안에 있는 세계에 집중할 것을 요구합니다. 작고 복잡한 놀거리로 꽉 차 있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어플은 아이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고 즉흥적인 반응을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혼자 놀기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자기 이익이 침해되는 것에 매우 민감하며, 자신의 취향을 절대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는 강한 개인주의 성향을 보입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다음 세대가 신앙을 잘 형성할 수 있을까요? ■ ‘신앙 형성’을 위한 두 가지 먼저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그들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시84:4) 다음 세대들이 있어야 할 곳이 ‘주의 집’ 즉, ‘성전’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과거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이사할 때 반드시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와의 거리’였습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이 커서 가급적 교회 근처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자녀교육, 주거환경, 부동산 가치 등이 이사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삶의 경계’를 ‘성전과 연관’시켜야 합니다. 주의 성전을 멀리 떠나지 않으려는 마음, 성전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정신’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공간적 의미를 넘어 ‘삶’이 ‘성전 중심’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의 신앙 형성을 도울 수 있는 ‘가족 하브루타’ 대화법을 소개합니다. ‘가족 하브루타’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고, 그것을 이번 한 주간 어떻게 실천하며 살 것인지에 대해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주일 저녁에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시간을 선정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먼저 어떤 말씀을 들었는지,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 나눕니다. 이어서 자녀가 교회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합니다. 이때 자녀들의 지식적 앎을 점검하기보다 배운 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적용할 것인지 표현하고 구체화하도록 대화를 통해 이끌어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자녀들이 스스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생각하도록 이끌어 주며 그 과정을 모니터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녀들의 일상이 늘 주의 집에 사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84:4) 다음 세대에게 ‘항상 주를 찬송’하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는 삶의 중심이 예배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예배보다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앞에서 예로 든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하루종일 다양한 재미를 누릴 수 있는 세상입니다. 심지어 예배 시간에도 스마트폰으로 예배의 지루함을 견디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다음 세대는 점점 예배 중심의 삶보다 재미 중심의 삶을 추구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재미’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이 있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항상 주를 찬송하는 자’로서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교훈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훈계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삶 속에서 신앙적 본을 보이는 ‘모델링’ 교육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매순간 말, 감정, 행동의 본이 됩니다. 자녀는 부모를 보며 자라기에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삶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자녀도 자연스럽게 부모가 걸어갔던 신앙의 길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자녀의 신앙을 형성하는 데 부모가 자녀 앞에서 신실한 신앙의 본을 보이는 것보다 확실한 교육은 없습니다. 우리는 부모 세대로서 다음 세대의 신앙 형성을 위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 두 가지를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가 모델이 되어 ‘성전 중심의 삶’, ‘예배 중심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을 잘 형성한 다음 세대에게는 어떤 약속이 있습니까?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5) 시온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곳,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대로’는 하나님과 관계가 막힘 없이 훤하게 뚫린 고속도로와 같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잘 형성된 다음 세대는 시온의 대로를 만들 수 있도록 주께서 힘을 주신다는 약속을 갖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시84:6) 인생은 언제나 평탄한 길만 걸을 수 없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있고, 눈물과 슬픔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광야를 지나는 삶 가운데 ‘반석에서 샘물’이 솟는 기적이 일어나며, 하나님께서 은혜의 샘과 생각지 않는 위로와 보살핌을 베풀어 주신다고 합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7) 또한 하나님은 성도에게 한 번만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지치고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일어설 힘을 주시며, 걸어갈 길을 끝까지 다 걸어가도록 힘을 주십니다. 홍수 때부터 왕으로 좌정하신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하시며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십니다(시29:10-11). 넘어질 일이 생겨도, 주저앉더라도, 다시 힘을 내서 걸어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힘을 주십니다. ■ 신앙 전수보다 신앙 형성 그동안 부모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것에 주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 전수보다 ‘신앙 형성’ 자체가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의 신앙 형성을 위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서 ‘성전 중심’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다음 세대의 신앙 형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예배 중심’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복의 통로인 시온의 대로를 열어 주십니다. 또한 삶 가운데 많은 위로를 더하실 것을 약속하셨고, 성도에게 계속해서 힘을 주신다고 굳게 약속하셨습니다. 다음 세대의 신앙이 온전히 형성되어야 우리의 가정과 교회도 비로소 설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함께 우리 가정과 교회를 온전히 세워 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나는 선한 목자라선한 목자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희생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팔레스타인의 유목민들에게 있어 목자와 양의 관계는 실로 생명적 결탁의 관계였습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위하여 ‘양의 우리’를 준비합니다. 이동 시에는 목자와 양이 함께 들판에서 야숙을 하는 임시 우리를 만듭니다. 어떤 경우는 돌로 벽을 쌓아 양들을 보호하는 요새를 만들고, 비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지붕을 덮었습니다. 아침이면 목자는 문 곁에 서서 양의 수를 헤아려 점검하고, 저녁이 되어 우리로 돌아와서는 다시 문 곁에 서서 양의 수를 한 마리 한 마리 확인합니다. 수가 모자랄 때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찾아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이러한 돌봄은 직업의식만으로는 어려운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자신의 위험이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아픈 양, 병든 양, 잃어버린 양만 생각합니다. 목자는 자신의 일하는 시간, 땀 흘린 노동의 대가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목자의 관심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의 우리에 있고, 그의 전 삶의 재능과 힘이 양의 목장에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희생적 사랑으로 양들을 돌봅니다. 이런 선한 목자는 삯꾼과 대조됩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10:12)” 품꾼의 관심은 오직 자신이 받아야 할 품삯에 있습니다. 품꾼은 양을 잃어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이리떼가 공격하면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양들을 두고 홀로 도망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들의 안전을 위해 이리떼와 끝까지 싸우고 때로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양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남원이 낳은 유명한 화가 김병종은 『바보 예수』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그림에 늘 한 방울의 눈물을 그립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다른 어떤 신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뿐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며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김병종 화백은 우리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가리켜서 ‘바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지나치게 똑똑합니다. 계산적이어서 이것저것 따지는 게 많습니다. 조건을 보고 사랑하고, 보상이 있어야 희생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섬김과 헌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을 지내면서 이 땅에 선한 목자로 오셔서 바보와 같이 사셨던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갑시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우리 또한 바보 같은 사랑과 섬김과 헌신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② 선한 목자의 또 하나의 특징은 친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요10:14-15) 여기서의 ‘앎’은 양의 이름은 물론 양의 특징과 형편을 잘 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관계의 모델이 바로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의 관계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아들의 순종이었듯이, 목숨을 버린 목자의 사랑과 목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가는 양의 순종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7-18)”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결코 대적자들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8장에는 예수님이 잡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죽음의 키스가 필요 없을 만큼 분명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체포를 스스로 요구하며 대신 자기 양들인 제자들을 놓아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계명인 줄 알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죽음의 고난을 당하기로 하신 예수님의 순종을 기뻐하시고 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권한임을 선포하십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10:18)” ‘권세’는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신적 권세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목숨을 버립니다. 권세가 없어서가 아니라 버릴 권세와 다시 얻을 권세가 모두 예수님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사역이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있지만, 철저히 자발적 선택을 통한 순종임을 강조합니다. 표면적으로 그의 죽음은 종교지도자들이 잡아 죽인 결과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선택하고 그 길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버릴 권세인 십자가와 다신 얻을 권세인 부활을 통해 현재 자기를 믿는 사람들과 이후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를 통해 풍성한 삶을 주는 선한 목자이심을 선포합니다. 우리를 위해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해스스로 제물이 되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의 사랑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복음에 합당한 삶은 양인 우리가 목자의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물이 되려면, 이 세대를 본받지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주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달리 번역하면, ‘합당한’입니다. 외면적이고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 감사, 순종, 경배, 그리고 예수님의 존재와 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험이 결합된 삶이 합당한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을 지내면서 선한 목자로 이 땅에 오셔서 자발적으로 순종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갑시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복음에 합당한 예배자로 살아갑시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원하여 십자가 형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고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나음을 입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한 목자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선한 목자로 이 땅에 오셔서 바보와 같이 사셨던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 자발적으로 순종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예배자로 온전히 세워져 나가길 기도합니다. -
Stand, 공동체를 유익하게!성경은 공동체의 일치와 연합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새번역성경은 이 부분을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로 번역합니다. 공동체로 함께하는 것이 본래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 뜻이며, 연합하는 것 자체가 아름답고 즐거운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서신서를 보면 그렇지 못한 공동체의 상황을 발견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 가운데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① 불평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 ‘싫어하거든’으로 번역된 단어는 자기 의지로 원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일할 기회가 있으나 이를 거부하고, 일보다는 말이 앞서는 것이 불평꾼의 특성입니다. 인간은 모두 각자의 고민을 안고 살아갑니다. 누구에게나 힘들고 피곤한 상황이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불평과 불만만 말하는 사람은 함께 있는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부정적인 말이 쌓이면 소음을 넘어 고통이 됩니다. 이런 불평꾼은 공동체를 유익하게 세워갈 수 없습니다. ② 말썽꾼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살후3:11)이 있습니다. 이들은 두루 다니면서 쓸데없이 부산스럽습니다. 남의 일에 과도하게 관여하며 말썽을 일으킵니다. 흰 양떼 가운데 섞인 골칫덩어리 ‘검은 양(A Black Sheep)’ 같은 존재입니다. 디오드레베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요삼1:9) 디오드레베는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를 소개하면서‘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합니다. 아마도 디오드레베는 섬기기 위해 낮아지는 리더십보다 자신의 명예와 특권을 위한 리더십을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복음과 공동체의 일치보다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요한은 그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요삼1:10) 디오드레베는 악한 말로 사람들을 비방하며, 자기와 생각이 다른 자를 냉대하였고,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자를 쫓아냈습니다. 으뜸이 되기를 좋아한 그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일은 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말썽꾼은 공동체를 유익하게 세워갈 수 없습니다. ③ 훼방꾼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살후3:12)”고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본분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남의 일을 방해하고 시끄럽게 하는 훼방꾼입니다. 느헤미야 성벽 재건 사역에도 훼방꾼이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이 힘을 모아 성벽 재건 공사를 진행하자 산발랏이 그들의 사기를 꺾으려 합니다. 예루살렘의 재건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그는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느4:2)” 외칩니다. 여기서 ‘미약한’으로 번역된 단어는 ‘사라지는’, ‘시들고 있는’, ‘소망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도무지 희망이 없는 민족이 어떻게 ‘스스로 견고하게 하’고,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킬 수 있겠느냐며 비웃습니다. 암몬 사람이며 산발랏의 참모였던 도비야 또한 귀환 공동체를 조롱하며 혼란을 야기합니다.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느4:3)” 합니다. 가벼운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비방하며 산발랏과 함께 유다 사람들의 성벽 재건 공사를 방해하고자 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귀환 공동체에 위기를 야기하는 훼방꾼이었습니다. 그러면 불평꾼과 말썽꾼과 훼방꾼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나와 이웃과 공동체를 유익하게 세워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불평꾼을 멀리하라 바울은“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3:6),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3:14)“고 합니다. ‘게으르게 행하(살후3:6)’는 자는 마치 행군의 대열에서 벗어난 낙오된 병사처럼 정해진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합니다.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않고, 주의 뜻을 저버리는 자들에게서 단호하게 떠나야 합니다.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오염되는 것을 예방하려면 철저하게 관계를 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명예와 수치를 중시하는 고대 사회에서 공동체에서 공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명예가 손상되는 부끄러운 일이었기에, 이들과 거리를 두는 태도는 잘못된 행위를 일삼는 구성원을 교정하는 효과적인 방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하는 것은 처벌과 추방보다 그를 회개시켜서 돌이키게 하는 것에 궁극적 목적이 있었습니다. 공동체에 해를 끼친 자이지만, ‘원수’가 아니며 여전히 ‘형제’라는 것입니다(살후3:15). 비록 불평을 많이 하고, 일만 만들며 힘들게 하고, 훼방하더라도 원수가 아니라 형제로 여겨주는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② 말썽꾼에게 본이 되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을 것(살후3:7)을 권면합니다. 바울은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살후3:7)’였습니다. 무질서는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여 공동체를 해칩니다. 바울은 공동체를 유익하게 만들기 위해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삶을 실천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유익보다 타인을 우선에 두었습니다(살후3:8). 종교 교사로서 후원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행사하지 않고, 성도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살후3:9). 이처럼 불평꾼들에게 본이 되는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③ 훼방꾼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 바울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3:13)”고 권면합니다. 공동체의 화평과 질서를 깨뜨리는 불평꾼, 말썽꾼, 훼방꾼 때문에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내가 선을 행함에도 불평하는 자들, 일부러 부정적인 말을 지어내는 자들, 선을 행하고자 할 때 훼방하는 사람들이 있어 낙심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 모든 의욕과 용기를 잃어버리고 지금까지 잘 해오던 선한 사역을 중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와 이웃과 공동체를 유익하게 세워가기 위해서는 낙심하고 넘어지고 실패하였을지라도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낙심할 만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일치와 연합이 있는 공동체는 아릅답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즐거움과 다양한 유익함이 넘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불평만 늘어놓는 불평꾼, 일을 만들기만 하는 말썽꾼,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하는 그 누구가 불평꾼이고, 말썽꾼이고, 훼방꾼이라도 그들은 우리의 형제자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수고를 다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와 이웃과 공동체를 유익하게 세워가기 위한 우리의 몫이고 책임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수고를 통해 나와 이웃과 공동체를 온전히 세워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
Stand, 내적 갱신으로!■ 내적 갱신으로! 성벽 재건이 완성되었다고 하여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재건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맛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이상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가 편하게 살 수 없었습니다. 영적으로 갈급해진 그들은 학사 에스라를 초청해서 말씀을 듣습니다. 백성들은 에스라가 읽는 말씀에 손을 들고 ‘아멘,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엎드려 땅에 얼굴을 대고 여호와께 온전한 예배를 드립니다.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그동안 율법에서 떠난 삶을 살아왔음을 깨닫고 애통해 하며 회개하는 눈물을 흘립니다. 이튿날 다시 에스라를 찾아간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초막절을 온전히 지키기로 합니다. 일주일 동안 천막 안에서 살면서 율법책을 낭독하고 팔 일째 되는 날에는 광장에 모여 큰 집회를 열었습니다. 초막절이 끝난 뒤 이틀 후에는 대대적으로 모여 성회를 갖습니다. 이번 말씀 낭독은 감격과 기쁨이 아닌 내적 갱신으로 이어졌습니다. ① 내적 갱신은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느9:1-2) 백성들은 모두 모여 금식을 시작했습니다. 말씀 낭독을 통해 듣고 깨달은 감격이 아직도 마음을 찌르고 있어서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극도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굵은 베옷을 입고, 자신의 가장 존귀한 머리 위에 가장 더럽고 천한 먼지를 뒤집어쓰며 철저한 회개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방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조차 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이방인들과 피를 섞고, 이방인처럼 죄를 짓고, 하나님 없이 살았던 자신들의 죄된 모습을 인식합니다. 거룩한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회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과 조상들의 죄를 모두 자백했습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에 와서 목이 곧아지고 불순종했던 죄, 하나님 대신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배신했던 죄까지도 회개합니다. ② 내적 갱신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열망으로 이어집니다.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느9:3) 백성들은 회개에 머물지 않고, 마음의 눈을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말씀을 들을수록, 자복하고 회개할수록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 받으실 대상임을 확신합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향하여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찬사를 드리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또 다른 레위 사람들이 나와서 “주님의 영광의 이름을 송축하라!”고 외칩니다(느9:5). ‘이름’은 어떤 존재에 대한 호칭인 동시에 ‘그 존재 자체’와 ‘그 존재의 본질’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그분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체적인 현실과 삶의 정황에서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구원과 도움과 승리와 축복의 손길을 베푸시면서 당신의 이름을 실제적으로 그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영화로운 것이며, 우리의 찬양의 구체적인 대상이시며, 너무나 존귀하셔서 아무리 찬양해도 부족한 것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홀로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시기에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하늘의 군대인 모든 천사들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과 기도, 경배와 찬양이 있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자 하는 열망의 자리에서 내적 갱신을 이어갑니다. ③ 내적 갱신은 신앙고백으로 완성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9:6). 그런데 이 신앙고백이 독특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늘을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고, 그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얼마나 있는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배움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철저하게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생명을 주시고 자연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의 자리에서 신앙이 성숙해져 가고 있으며, 내적 갱신이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신 분입니다(느9:7). 아브라함이 조상의 집을 떠나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된 것은 결코 그의 결단과 의지로 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구원의 여정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셨습니다(느9:7). 이름이 바뀌는 것은 새로운 정체성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우상 숭배자들의 소굴에서 불러내어 새로운 신분을 주시고,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길 수 있도록 새 출발의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나라를 이루고, 후손들이 왕이 될 것이며,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는 언약을 세우셨습니다(느9:8). 이 언약은 지금의 귀환 공동체 백성들과 직결되는 약속이었습니다. 주변 민족들로 인해 위태로운 상황에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셔서 자신들이 약속의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이끌어 내시고, 그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시며,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신들을 이끄실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 STAND, 내적 갱신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각자와 공동체가 주 안에서 굳게 세워지기 위해 ‘외형적 변화’뿐 아니라 ‘내적 갱신’이 있어야 합니다. 내적 갱신은 절대로 탁월한 프로그램이나 인위적인 강령에 의해 성취되지 않습니다. 내적 갱신은 예배가 온전히 세워진 곳에서 일어납니다. 말씀 앞에서 나와 공동체를 돌아보며 철저히 회개하는 곳에서,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향한 열망을 이어가는 곳에서, 말씀 앞에서 나와 공동체가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 고백이 세워져 나가는 예배 안에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비전 ‘Stand’는, ‘무너지지 않는 잘 서 있는 교회‘, ’외형적인 모습뿐만이 아닌 신앙의 본질이 온전히 세워져 무너지지 않는 교회‘를 지향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내면에서 내적 갱신이 신실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말씀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예배자가 됩시다. 그리고, 모든 예배에서 우리의 최선을 드리는 예배자가 됩시다. 우리가 최선의 예배자로 세워져 갈 때 내적 갱신으로 우리 각자와 교회를 온전히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
사랑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요한서신 수신자의 상황 요한일서에는 ‘우리’와 ‘그들’이라는 호칭이 나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사수하며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그들’은 ‘우리’에게서 분리돼 나간 교회 밖에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유혹하고 공격하므로 상당히 많은 성도들을 교회로부터 이탈시켰습니다. 요한은 이 복잡한 상황에서 성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요한은 교회 안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의 문제를 일일이 열거하며 각각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음행의 문제, 송사의 문제, 결혼에 관한 문제, 우상에게 바친 제물 문제, 사도의 권리 등 문제와 해결방안을 함께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오직 한 가지만을 주장합니다.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선언입니다. 과연 이것이 어떻게 교회 안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고백은 ‘내가 그 사랑에 감전된 사람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그분을 만나 ‘사랑이 되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사랑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입니다. 간음한 여인의 눈물에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나인성의 과부가 아들의 죽음에 통곡할 때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옆에서 호소하던 삼십팔 년 된 병자의 호소에 응답하시는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실패의 자리에서 눈물 흘리는 제자들을 회복시키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질문하심으로 그를 회복시켜 주신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아픔이 있는 곳에, 절망이 있는 곳에, 소외가 있는 곳에, 회복이 필요한 곳에, 문제가 있는 곳에 사랑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상황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이 어떠한 문제보다 더 능력이 있으며,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사랑의 힘이 우선임을 알았습니다. 요한은 그 사랑이 서신을 받는 교회의 문제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랑이 교회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사랑의 기원 요한은 요한일서 4장 19절에서 사랑의 기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사랑을 알 수 있었던 것, 우리가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것,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한 구원 과정으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누는 사랑의 기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에 우리가 감전되어 그 사랑을 나누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그분의 영광이 가리울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매순간 우리를 사랑으로 기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찬송가 가사처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복음의 중심은 하나님이 우리의 반역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품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아들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기꺼이 자기를 비우시고 인간이 되어 겸손히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떠맡는 사건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러한 성경의 말씀은 사랑이 여러 미덕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복음이요,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인 참 사랑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간 중심적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베풀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합니다. 기대에 맞지 않으면 실망하거나 불평하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고 또 주고, 그리고 기대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할 때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사랑의 방향 사랑에서 중요한 것이 방향입니다. 구약의 호세아서는 신실하지 못한 그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혼인 서약을 깨뜨려 그에게 슬픔을 가져다줄 여인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여인이 호세아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갔을 때도 하나님은 그에게 그 여자를 다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였기에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선포하는 사명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죄를 지어 벌을 받는 와중에도 그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가득한 훈계로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둘”(10:13)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을 것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습니다. 요한은 이와 같이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요한은 사랑의 방향에 주목합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1) 하나님의 뜻이 담긴 계명은 크게 두 차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에 대한 진리 위에 굳게 서는 수직적 차원이며, 다른 하나는 언약 백성을 사랑하는 수평적 차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수직적 차원뿐만이 아니라 서로 사랑으로 수평적 차원을 세워가는 일 또한 중요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자 뜻이며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기대입니다. 요한은 요한1서 4장 11절에서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행함과 진실함으로(요일3:18)” 서로 사랑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랑의 방향이 이웃을 향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시간은 나를 위한 ‘자기 중심적’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삶의 문화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 이익이라는 렌즈를 통해 ‘자기 중심적 삶’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자기를 우선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타인을 바라보는 마음이 있어야 사랑의 방향이 내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이웃을 향할 수 있습니다. ■ 사랑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사랑에 응답하여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랑은 완성되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도 알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머리로 알던 하나님 사랑을 가슴으로 알 수 있으며, 입술로 사랑하던 내가 손발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기원을 친히 알려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방향을 친히 알려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랑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 사랑을 실천하여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삶으로 살아내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
재건(再建)의 위기, 기도와 전략으로 맞서다■ 재건(再建)의 위기, 기도로 맞서다 공동체의 진면목은 위기가 닥쳤을 때 드러납니다. 느헤미야중심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귀환 공동체의 유대인들또한 신분의 높고 낮음을 넘어 성벽 재건이라는 사명에 각자의 힘을 보태며 하나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성벽 재건을 훼방하는 자들이 집요하게 괴롭힙니다. 사마리아 총독인 산발랏은예루살렘의 재건은 곧 이스라엘 공동체의 재건이며, 이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게 분노’합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크게 분노하여’라고 한 단어로 번역되었으나, 본래 ‘격노하다’와 ‘격분하다’라는 두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유다 사람들을 비웃습니다. 소망도 없고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견고해질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그들의 사기를 꺾고 있습니다. 도비야 또한 귀환 공동체를 조롱하며 혼란을 야기합니다. 그는 산발랏에게 맞장구치면서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성벽이므로 자신들의 군대 앞에서는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빈정댑니다. 발자국도 남기지 않을 만큼 가볍고 민첩한 여우가 올라가도 금세 무너질 허접한 성벽을 쌓고 있다고 비아냥거립니다. 느헤미야와 귀환 공동체는 녹록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용기를 내어 성벽 재건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적자들이 말로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말은 귀환 공동체에게 소망과 용기를 잃게 만들고, 믿음이 흔들리게 하는 장벽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대적자들의 훼방하는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대항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구체적이면서도 간절하게 귀한 공동체의 현실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느4:4-5) 그는 먼저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현재의어려움을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위협앞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관계에 근거해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주인이자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고자 이 같은 명칭으로 하나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하나님께구체적으로 기도합니다. 유다 백성들을 다시 종으로 삼으려는 그들의 계획이 도리어 그들 자신들에게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대적들의 조롱과 욕설이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의「위기는 선물이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륀 신부는 삶에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모든 위기에 대한 극복 방법을 소개합니다.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냉정을 유지하며 위기를 객관화하기, 내면에 머무르기, 작은 조치를 실행하기등의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륀 신부는 무엇보다도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기도가 위기에 맞서는 구체적 길을 찾도록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데 기도가 제일 중요하다고 합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이와 같이 백성들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느4:6)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다’를 직역하면 ‘그리고 그 백성에게는역사할 마음이있었다’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건축의 직접적 주체가 ‘백성’이 아니라 ‘마음’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벽 재건 공사에 임하는 백성들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으며그 자세가 얼마나 헌신적이고 자발적이었는가를 부각합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의 원활한 진행의 근저에는 탁월한 느헤미야의 기도와 함께 뭉친온 백성의 하나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위기를 기도로 맞설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도가 두드리면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다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는 아닙니다. 또한 기도한다고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해도 걱정이 되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마음 속에 찾아온 삶의 두려움을 이겨내게 합니다. 기도는 말씀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따라서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속사람이 담대하고 강건한 영적 능력을 입는 것이 우선입니다. 왜냐하면 그 영적 능력이 보이는 세상을 이기고 마침내 영광의 승리에 참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 재건(再建)의 위기, 전략으로 맞서다 예상치 못한 방해 속에서도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꾸준히 비전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어려움은 계속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를 포함한 일당들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진척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심히 분노합니다(느4:7). 그리고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느4:8)”고 모의합니다. 산발랏은 도비야뿐 아니라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및 아스돗 사람들과 연합했습니다. 북쪽에는 사마리아인, 동쪽에는 암몬 사람들, 남쪽에는 아라비안 사람들, 서쪽에는 아스돗 사람들에 의해 포위된 형국이었습니다. 이들은 힘을 모아 예루살렘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추후 상부에는 페르시아 제국을 반역하는 자들을 진압했다는 명분을 둘러댈 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사방을 에워싸 버리자 유다 사람들도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이 상황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서술합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노래가 퍼지고 있었다. 흙더미는 아직도 산더미 같은데, 짊어지고 나르다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 힘으로는 이 성벽 다 쌓지 못하리( -
재건(再建)의 기초, 비전 선포 <느2:11-20>재건(再建)의 기초, 비전 선포 <느2:11-20> 글| 이승구 담임목사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온 지 삼 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는 소수의 사람을 데리고 잠행을 나섭니다(느2:12). 느헤미야 기록을 보면 골짜기 문에서 분문까지의 길이를 1000규빗이라고 합니다. 1000규빗이면 450m 정도가 됩니다. 느헤미야는 이 정도의 거리를 가면서 줄곧 예루살렘 성벽의 상황을 자세히 주목하여 살펴보고 조사하였습니다. 그가 본 것은 무너진 성벽과 불탄 성문뿐이었습니다. 어느 한 곳도 온전한 곳이 없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민족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후 비전을 선포합니다.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느2:17) 그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선포합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비전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까? 먼저 느헤미야의 비전 선포는 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민족의 아픔을 품고 기도하는 리더였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전을 발견하였고, 기도하는 가운데 민족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준비하는 리더가 되었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놓고 기도하면서 민족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영적 통찰력을 갖게 되었고, 새로운 도전을 위한 용기와 힘을 얻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영적 통찰력을 갖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영적 통찰력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며,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것을 듣게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비전을 보게 합니다.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라는 책 제목처럼 비전 선포 또한 기도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영적 통찰력이 깊어집니다. 그 통찰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우리를 이끄는 비전이 보입니다. 두 번째로, 느헤미야는 냉철한 판단력을 통해 비전을 다듬어갔습니다. 그는 잠행을 통해 얻은 정보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리더였습니다. SWOT라는 문제 분석법이 있습니다. Strength(강점), Weakness(약점), Opportunity(기회), Threat(위협) 등 기업 내부 조직, 팀, 개인의 역량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외부 환경요인인 기회, 위협 요인을 분석, 평가하고 이들을 연관시켜 전략을 개발하는 툴(TOOL)입니다. 느헤미야도 잠행을 통해 공동체 내부와 외부의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단일 신앙 공동체이자 한 민족 공동체입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잠재성이 강점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어려움을 겪으며 재건에 대한 두려움이 깊다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닥사스다 왕의 지원으로 다양한 물적, 인적 자원을 갖춘 호재를 맞이했습니다. 반면, 성벽 재건을 비웃는 산발랏과 도비야의 끈질긴 훼방, 외부의 침입에 의한 환난과 능욕이 끊이지 않는 위협적 상황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더 이상 분열되지 않고 한 마음 한 뜻으로 함께 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 냉철하게 판단하여 비전을 다듬어 나갔습니다. 셋째로, 느헤미야는 공동체에 동기를 부여하며 비전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이 있는 리더였습니다. 그는 필요한 시기에 적합한 말로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합니다. “우리가 왜 무시를 당해야 합니까? 일어나서 건축합시다! 모두 힘을 내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실패감에 깊이 절망하고 있는 백성들과 성벽 재건이라는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동기가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왜 성벽을 재건해야 하는지 그 동기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에서 비전이 완성된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비전 선포에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느2:18)’기로 합니다. 그들은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성벽 재건에 대한 의지를 피력합니다. 느헤미야의 동기부여로 인해 당시 제사장들과 방백들, 포로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 그룹과 백성들이 모두 동참합니다. 이제 성벽 재건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귀환 이후 그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던 대적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느헤미야의 일을 방해합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느2:19) 대적자들은 느헤미야 일행의 계획을 듣고서 두 개의 동사로 자신들의 행동을 나타냅니다. 먼저 ‘업신여기다’라는 말은 어떤 것에 거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마땅히 귀하게 여기고 존중해야 할 어떤 대상을 경시하고 모욕하는 부당한 태도입니다. 업신여기는 말은 열심히 해 보겠다는 사람의 의욕을 꺾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또한 ‘비웃다’는 말은 ‘말을 더듬다’라는 의미입니다. 타인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더듬더듬 말하여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여 상대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대적자들은 느헤미야와 그와 함께 하는 자들을 업신여기고, 또한 우스꽝스러운 말로 비웃으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합니다. 비전 선포로 똘똘 뭉친 사람들의 마음을 흐트러트리려 합니다. 나아가 대적자들의 훼방은 협박으로 이어집니다. 성벽 재건 시도를 반역 행위로 규정하면서(느2:19) 이들을 저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어떤 훼방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을 조롱하는 대적자들에게 이렇게 반박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느2:20)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의 허락을 받고 귀환민들과 함께 성벽을 재건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추진하는 이 일은 반역이 아니라 왕명을 따르는 일입니다. 오히려 느헤미야 일행을 방해하는 대적자들의 행동이 반역인 셈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오직 신앙적인 측면에서 답변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형통케 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대적자들의 음모를 물리칠 수 있는 가장 뚜렷한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합리적인 반박의 항변보다도, 지금까지 함께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무한 신뢰가 느헤미야에게는 가장 큰 힘이었으며, 대적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습니다. 조선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노래 <용비어천가> 2장은 뿌리가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을 소재로 합니다. 특히 샘이 깊은 물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그 샘에서 나오는 물이 내를 이루어 결국 바다까지 흘러간다고 합니다. 느헤미야의 삶이 바로 이런 샘과 같았습니다. 그는 쓰러져 가는 민족에게 필요한 생명수를 흘러보내는 샘과 같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소망이 없어 말라가는 민족에게 소망의 생명수를 공급하는 샘과 같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을 살리는 물을 흘려보내는 샘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비전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이 비전이 이 시대에 우리의 삶과 신앙과 예배의 재건을 위한 기초가 될 것입니다. 이 비전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이 비전은 우리에게 주신 지혜를 통해 다듬어집니다. 이 비전은 함께 공유하며 동기 부여가 될 때 완성되어 갑니다. 이러한 비전을 통해 삶의 재건을 위해, 신앙의 재건을 위해, 예배의 재건을 위해 생명을 살리는 물을 흘러보내는 깊은 샘과 같은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신앙, 내일을 기대하는 삶 <창 6:1-11>신앙, 내일을 기대하는 삶 <창 6:1-11> 글| 이승구 담임목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그리고 내일과 똑같은 모레를 살아갑니다. 매일 마주하는 공간에서, 매일 스치는 사람들과, 매일 비슷한 일을 합니다. 때로 여행과 같은 새롭고 낯선 사건도 일어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제자리로 돌아와 평범한 일상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평범한 일상의 반복에 만족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매일 자신의 일상이 의미 있는 일로 충만하기를 열망하지만, 내일을 기대하지 못하는 오늘이 점점 늘어납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오늘 하루도 별 의미 없이 지나갔구나!’, ‘내일은 희망이 있으려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채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이 점점 사라집니다. 괴테는 “만약 내가 젊었을 때부터 나 자신의 욕구를 그토록 강력하게 잠재우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 분별력을 갈고닦아 넓고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나는 매우 옹졸하며 꼴볼견인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헛된 욕구에 대해 절제하면서 ‘내일이 기대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꾀인지 아닌지, 죄인의 길인지 아닌지 분별하는 삶을 살아내는 과정에서 ‘내일이 기대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는 보편적인 인간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내일이 기대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내일을 기대하는 삶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창 6:1-2) ‘번성’은 ‘가득하다’는 의미로, 본래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요, 축복이었습니다(창1:28). 그러나 사람이 번성하자 욕망도 함께 자라났습니다. 부흥의 시대 이면에 타락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건강한 아름다움이 아닌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다른 하나는 재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여인들이 하나님 없이 재미있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창세기 3장에도 등장한 바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창3:6)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본즉’은 바로 ‘그릇된 판단을 하는 순간’입니다. 하와가 금지된 나무의 열매가 ‘먹음직’함을 ‘보고’ 결국 그것을 따먹은 일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름다움’을 보고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은 모두 악하고 부정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처럼 땅 위에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내를 맞이하는 ‘판단의 기준’이 흔들렸습니다. 성경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관능적이고 즐거움을 주는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분별해야 할 것을 분별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육신의 욕심대로 사는 자들이 분별력 없는 삶을 살아가자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해집니다. 죄악이 보편화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셨습니까?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6)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7) 하나님은 그분을 떠난 자들 때문에 한탄하시며 근심하셨습니다. 분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셋의 자손’마저도 죄악의 보편성을 선택하자, 하나님의 마음은 심판을 결심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납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직접 심판하겠다고 합니다. ‘내가’ 창조하고 심히 기뻐하셨던 ‘피조물’을 직접 쓸어버리겠다고 결단하는 마음은 아마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신앙의 보편성을 지녀야 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도리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악한 ‘죄악의 보편성’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노아는 달랐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본문에서 노아는 세 가지로 묘사됩니다. 먼저 그는 ‘의인’이었습니다. 여기서 의인은 절대적인 의를 나타내기보다는 매사에 욕심이 없으며 행하는 자세가 옳은 상대적인 의를 뜻합니다. 노아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방주를 만들 때도, 방주에 들어갈 때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방주에서 나오자 먼저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노아는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쓴 의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새로운 상황 가운데서 내일을 기대하는 삶을 살아냅니다. 또한 노아는 ‘완전한 자’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악인처럼 행동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노아는 죄 많은 세대의 유혹을 분별하고, 생애 전체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렇게 완전한 자로서 내일을 기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습니다. 과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동일한 히브리어로 서술되었습니다. 동행은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걸어다니는 주체는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곁에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삶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함께 그의 삶을 옆에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을 나타냅니다. 또한 동행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입니다. ‘나의 상처’를 보여줄 수 있고, 내 인생의 짐을 맡길 수 있는 신뢰 깊은 관계입니다. 노아는 욕망을 제어하는 삶, 죄악을 분별하는 삶, 하나님과 동행이 보편성이 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의 ‘의인’, ‘완전함’, ‘동행’보다 앞서 있습니다. 즉, 노아가 의로워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노아는 욕망을 제어할 수도, 죄악을 분별할 수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어려운 시기에 의인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혼란한 시대의 한복판에서도 ‘내일을 기대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는 과정을 살아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은혜가 있어야 신앙을 깊게 하며, 신앙의 지경을 넓히고, 신앙의 본질을 찾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우선입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삶을 살아내는 자가 진짜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이 내일을 기대하게 합니다. 평범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그 일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할 때, 그 내일은 오늘보다 더 큰 소망을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누리는 과정 속에서 참된 신앙의 힘을 얻어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
내 마음속 불청객, 무력감 <요나 3:10-4:5>내 마음속 불청객, 무력감 <요나 3:10-4:5> 글| 이승구 담임목사 ■ 마음의 불청객, 무력감 사람은 스스로 상황을 변화시킬 힘이 없을 때 허탈감을 느낍니다. 점점 의욕이 없어지고 맥이 빠지며 우울하다가 급기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친 상태에 이릅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는 「참 소중한 나」라는 책에서 무력감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대표적인 영역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먼저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데도 늘 같은 잘못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며 무력해집니다. 두 번째로 다른 사람이 주는 상처나 모욕 앞에서도 쉽게 무력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발생하는 일에 대응할 힘이 없음을 발견했을 때 무력감을 느낍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문제로, 때로는 타인과의 문제로, 때로는 세상의 문제로 무력감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우리도 무력감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무력감 때문에 뜻하지 않은 사건을 경험하기도 하고, 무력감 때문에 삶의 방향이 부정적으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무력감을 경험한 요나의 이야기입니다. 요나의 무력감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데서 시작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충분히 대가를 치른 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께서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사람들은 예고된 재앙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니느웨의 대각성 운동에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욘3:10). 그런데, 이러한 대각성 운동의 단초를 제공한 요나는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욘4:1) 여기서 ‘성내다’라는 말은 분노가 극심해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요나는 자신의 감정을 폭발하게 만든 원망의 대상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은 자신이 뛰어넘을 수 없는 절대자, 여호와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안 요나는 원망의 대상인 절대자에게 항변하기 위해 기도자의 자리에 나아갑니다(욘4:1). 그런데, 기도의 내용이 범상치 않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4:2) 요나의 기도는 원망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비꼬는 기도입니다. 요나는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 원망을 바꾸어 말하면 “이런 일이 생긴 것은 다 당신 때문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강한 원망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속성을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내가 크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비웃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절대자에게 때로는 원망의 마음으로, 때로는 비꼬는 마음으로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다 털어놓았지만, 그는 평정을 되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자신이 행한 일이었지만, 그 일의 결과가 자기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자, 불편한 마음은 심한 분노로 치달았고, 그 분노는 다시 허탈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제 요나는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 강하게 항변합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용서받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하겠다고 초강수를 둡니다. 자기의 기대나 염원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을 보느니, 내 생명을 잃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항변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욘4:4) 여호와께서는 요나가 보여준 행동은 옳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마음이 불편한 것, 네가 분노하는 것, 네가 나를 원망하면서 비꼬는 것, 네가 목숨을 가지고 나에게 항변하는 것, 그 어떤 것도 정당하지 않다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최후의 항변마저 무색해진 요나는 이제 무력감의 절정에 도달합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욘4:5) 자신의 마지막 항변이 아무 소용없음을 깨달은 요나는 지금까지 논쟁의 장소였던 성읍에서 퇴장합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이제 더 이상 논쟁할 의욕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그는 주저앉습니다. 본문 5절에는 요나가 앉았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그가 앉아 있다’는 것은 이러한 관찰자의 자리에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나서의 각 장에서 요나가 행한 중요한 일을 한 단어로 요약해 보면, 5장에서 ‘앉다’의 의미를 다르게 볼 여지가 있습니다. 1장에 나타난 요나의 가장 중요한 행동은 ‘도망’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싫었던 요나는 도망을 선택했습니다. 2장에서 요나의 가장 중요한 행동은 ‘기도’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3장에서 요나의 중요한 행동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에 순종한 요나는 니느웨 성을 향하여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선포합니다. 그러나 4장에 나타난 요나의 행동은 ‘앉아’입니다. 도망가고, 기도하고, 다시 니느웨로 가는 모습과 달리 4장에서 요나는 주저앉습니다. 지금까지 요나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 사역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갑자기 성 밖으로 나가서 앉아 구경이나 하겠다고 합니다. 이겨낼 수 없는 허탈감에서 찾아온 무력감은 그를 주저앉게 만들었습니다. 무력감 때문에 주저앉은 요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요나의 마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보기에”라는 생각입니다. 요나는 “내가 보기에” 니느웨 성은 심판을 받아야 하고, “내가 보기에” 니느웨 성은 절대로 회복되어서는 안 되고, “내가 보기에” 니느웨 사람들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의 생각을 지배하는 주된 사상은 “내가 보기에...” 였습니다.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보단 ‘내가 보기에...’ 때문에 그는 늘 뾰루퉁했습니다. ‘내가 보기에...’와 다른 세상 때문에 그는 마음이 불편했고, 분노했고, 원망했고, 강하게 항변했고, 나가서 주저앉아 버리는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요나가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요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보기에...’를 버리는 일입니다.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보기에...’라는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서 한 사건을 준비하시고, 이 사건에 필요한 모든 소품까지 직접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6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7절)”,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8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이 소품들을 통해 요나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네가)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욘4:10) 하나님은 여기서 ‘네가’를 세 번이나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야, 네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내가 보기에....’라는 마음을 갖고 있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이어서 이 모든 것의 주관자는 ‘네가’ 즉 ‘요나가’ 아니라, ‘내가’ 즉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4:11) 하나님은 요나에게 네가 싫어하는 그들도 나 하나님이, 나 여호와가, 나 창조자가, 나 구속자가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요나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내가 보기에...’라는 집착된 사고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보기에...’라는 사고에서 벗어날 때 지금 직면한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력감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생각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이 무력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무력감은 ‘내가 보기에...’라는 생각이 지배적일 때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무력감을 이겨내려면 ‘내가 보기에’라는 고착된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무력감을 극복하려면 ‘내가 보기에’라는 고집스런 마음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능성을 담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찾아온 불청객인 무력감을 물리치기 위해 ‘내가 보기에’라고 계산하는 것대신에 ‘주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빈티지 교회, 어떻게? < 행1:8 >|생명의 말씀 빈티지 교회, 어떻게? < 행1:8 > 우리는 지난 3주에 걸쳐 전통과 새로움이 조화를 이루는 ‘빈티지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회는 누가 모이는가’, ‘교회는 모여서 무엇을 하는 곳인가’라는 질문을 살펴 보았습니다. 먼저 ‘교회는 누가 모이는가’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는 거듭난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 교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교회는 모여서 무엇을 하는가’와 관련하여, 교회는 배움, 교제, 예배가 있고,하나됨이 있으며, 거룩함을 위한 훈련이 있는 곳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어떻게 흩어지는가’를 주제로 『빈티지 교회』라는 제목의 책에 언급된 교회의 정의를 계속 살펴 보겠습니다. 『빈티지 교회』에서는 교회가 ‘세상에 나아가는 선교사’로서 ‘지상 계명과 지상 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흩어진다’고 정의합니다. 이 땅에 처음으로 세워졌던 예루살렘 교회가 지닌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세상을 향하여 그 교회가 어떻게 흩어졌는지를 살펴보면서,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 빈티지 교회, 예루살렘 교회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과 사도행전의 첫 장에서예루살렘은 매우 특별한 장소로 묘사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시 만난 곳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는 장면을 간략하게 묘사합니다(눅24:50-51). 그리고 이를 목격한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눅24:52-53)고 합니다. 제자들은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시대를 열어갑니다. 이와 함께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24:47)”라는 말씀처럼 복음의 역사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절)”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맡겨 주신 선교 명령입니다. 실제로 이 말씀에 근거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으로 전파됩니다.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권능-증인‘이 마치 3종 세트처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아야 비로소 증인으로 흩어져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성령의 임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행1:8)”에서 ’~에게’로 번역된 전치사는 본래 ‘~ 위에’라는 뜻입니다. 즉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재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임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본동사보다 앞선 시제를 사용합니다.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하는 사건이 먼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있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주목하게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각 지체 위에 임하는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교회를 이루기 위해 모이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의 임재하심이 우선이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를 세워가는 원동력이었습니다. 2) 권능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를 보겠습니다. 예수 시대에 권능은 예수님의 사역을 시작하게 한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힘(눅24:49)을 말합니다. 이 권능은 병을 고치는 능력(눅8:46)이며, 귀신을 제어하는 힘(눅9:1)이고, 원수를 대적하는 능력(눅10:19)이었습니다. 즉 예수 시대의 권능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필수적인 능력이었습니다. 사도 시대에 이 권능은 사도들의 사역과 관련하여 나타납니다. 성령을 통하여 임한 권능은 사도들이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하였고(행2:14), 병자를 치유하였(행3:6)습니다. 사도 시대에 이 같은 권능을 통해 가장 먼저 큰 변화를 경험한 자는 베드로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자, 삼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의 손길을 통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되었던 한 사람이 성전 미문 앞에서 일어나는 걸어갔습니다. 또한 그는 공회에 붙들려 가는 상황에서도 복음을 담대히 말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을 가능하게 했던 권능이 사도들이 사역하던 시대에도 함께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는 두 번째 특징입니다. 3) 증인 “내 증인이 되리라(행1:8)”에서 증인이란 직접 보고 들은 바를 확언하고 증언할 수 있는 자의 의미와 함께 순교자를 나타낼 때도 사용됩니다.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행22:20)” 증인이란 스데반과 같이 예수에 대해 입으로 증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온 생명까지 다해서 증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한 ‘되리라’는 영어의 be동사와 같은 것입니다. be동사는 존재의 상태를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증인이 되리라’는 삶의 자리에서 ‘순교자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빈티지 교회, 영은교회 2000년 전에 이 땅에 처음으로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처럼 우리 영은교회가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닌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곳에 모여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권능’을 힘입고, ‘흩어져 증인으로 살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 삶의 중심으로 성령님이 친히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각자의 인생과 동떨어져 ‘추상적’으로 계시지 않고, ‘인생의 장’이 펼쳐지는 곳에 ‘구체적’으로 임재하십니다. 성령의 임재는 한순간의 감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꿈꾸게 합니다. 다음으로 ‘권능’은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강력한 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권능은 큰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영역에서 실제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권능은 우리를 작은 변화로부터 새롭게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