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와 사순절 소시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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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와 사순절 소시지 사건

- 스위스 종교개혁 3 -

글: 김명희 기자

  • 등록 2023.05.05 14:21
  • 조회수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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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

츠빙글리는 1518년에 스위스 취리히 제1의 교회인 그로스뮌스터교회의 주임 목회자로 청빙을 받았다. 1227일에 취리히에 도착한 츠빙글리는 자신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약속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강해 설교였다. ‘원천으로 돌아가자’(ad fontes)란 표어 아래 시작된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서 그 길을 찾았다. 종교개혁가 루터나 츠빙글리는 당시 타락의 온상이었던 교회를 바로잡을 유일한 답이 오직 성경에 있다고 확신했다. 교회도 교황도, 성인도 성물도 아닌,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근거라고 여겼다. 츠빙글리는 믿음은 오직 성경 말씀을 듣고 연구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로스뮌스터교회의 첫 사역으로 강해설교를 시작했다.

 

츠빙글리, 강해설교의 전통을 세우다

예배 설교학자인 주승중 목사(: 주안장로교회, :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강해설교란, “성경으로부터 신실하게 메시지를 받아서, 그 메시지를 현대의 청중들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설교라고 정의한다. 강해설교는 삶의 장에서 발견된 주제를 선택하고 거기에 맞는 성경 본문을 찾아 전개해 나가는 주제설교나, 짧은 본문을 사용하며, 성경 본문을 나열식으로 주석해 가는 본문설교와는 다른 설교다. 주승중 목사는 메릴 엉거의 말을 인용해, “강해설교는 성경에 관해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강해설교는 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나는 성경 중심적 설교를 뜻한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루터도 성경이 성경으로 말하게 하라, ‘성경 자체의 자기 해석’(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을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그로스뮌스터교회에 부임하던 해에 마태복음에 대한 연속적 강해 설교(lectio continua)를 시작했다. 교인들이 강해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되돌아볼 수 있게 했다. 츠빙글리는 미리 지정된 복음서와 서신서 본문들을 따르던 당시의 관습(lectio selecta)에서 크게 벗어나, 본문을 자유롭게 정해 설교를 했다. 그는 한 권의 성경을 택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설교했고, 이러한 강해설교는 성경 전체로 확대됐다. 그는 4년 만에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신약성경 전체를 강해하였으며, 주중 예배에서는 시편을 설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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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취리히 그로스뮌스터교회
 (츠빙글리의 첫 주임목회 교회)

츠빙글리의 강해설교 목표는 원천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설파하며 청중들의 가슴 속에 순전한 그리스도를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입증될 수 있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설교하지 않았다. 성경만이 기독교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믿었다. 츠빙글리는 성경 전체에서 분리된 부분적인 본문이 아닌, 성경 전체를 강해했다. 마침내 그는 설교를 통해 취리히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사람들은 그런 설교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다.”라며 칭송했다. 사제와 수도사들의 지루한 설교에 신물이 났던 저명한 두 시민은 츠빙글리의 첫 번째 설교를 들은 후,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진리의 설교자이며, 사람들을 속박에서 해방시킬 모세와 같은 인물이다.”라며 공언했다.

츠빙글리는 강해 설교를 통해 기존의 설교와는 다른 새로운 설교전통을 세우게 됐다. 이것은 개혁교회의 중요한 전통이 됐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강해 설교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요즘 수요예배마다 진행되는 마가복음 강해도 그중 하나다.

 

사순절 소시지 사건,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다

츠빙글리가 스위스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522년 사순절 기간에 발생했던 소시지 사건때문이다.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순절 동안에는 육식을 금했다. 그런데 츠빙글리는 사순절 기간 육식 금지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이 설교를 들은 츠빙글리의 몇몇 친구들은 모여서 소시지를 먹었다. 돼지고기로 만든 소시지를 먹었다는 것은 사순절의 육식 금지 전통을 깨는 행위였다. 이것은 교회 내 큰 분란을 가져왔다. 로마교회에서는 사순절 금식 규례를 어긴 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콘스탄츠 주교도 취리히로 사절단을 보내 관습적인 금식을 준수해야 함을 촉구했다.

츠빙글리는 소책자(1522.4.16. 발행)에서 사순절에 육식을 금하는 것은 아무런 성서적 근거가 없으며, 하나님이 주신 음식은 무엇이나 먹을 자유가 있다고 변호했다. 그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취하거나 금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교회는 이러한 자유를 금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바울의 견해에 근거했다(고전 8:8; 10:25; 2:16; 딤전 4:1; 14:1-3; 15:1-2). 츠빙글리는 사순절 육식 금지에 대한 강력한 반대로 위험에 처하게 됐다. 루터가 95개 논제 발표로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면, 츠빙글리는 육식 금식 논쟁으로 암살 위기에 놓이게 됐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승리를 확신했다. 사순절 소시지 사건은 오히려 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을 목표로 67개 조항의 논제를 작성하게 된 출발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