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유산을 찾아서 ‘동양의 예루살렘' 이었던 평양 -평양 장대현교회-

신앙의 유산을 찾아서 ‘동양의 예루살렘' 이었던 평양 -평양 장대현교회-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 등록 2018.10.01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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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유산을 찾아서 

‘동양의 예루살렘' 이었던 평양

-평양 장대현교회-

글 |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지난 9월 18일~20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틀에 걸쳐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정상회담을 가졌고, 

20일에는 두 정상이 나란히 백두산 천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한 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땅 평양을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밟고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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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재 언덕에서 만수대 광장으로 

현재 평양 만수대 광장(김일성 광장)은 1907년 평양대부홍오동을 이끌었던 장대현교회가 있던 자리다. 

당시 장대재 언덕으로 불렸던 만수대 광장에는 김일성 동상이 서있다. 

1972년 북한정부는 김일성의 60회 생일을 기념하여  20미터 높이의 초대형 동상을 건립했다. 

만수대 동상은 북한 전역에 있는 3만 5천여개의 김일성 동상 중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장대현교회가 있던 장대재 언덕은 평양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평양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날씨가 맑은 날에는 황해도까지 보인다. 장대재 언덕은 북한정권이 들어 선 후 '만수대’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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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예루살렘 이 된 평양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인천에 도착했다. 

2년 후인 1887년 4월 아펜젤러가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였고, 그 해 가을 언더우드가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여행했다. 

이듬해 4월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 지역의 선교거점으로 평양 선교부 설립을 위해 살폈다. 

1890년 장로교와 감리교, 두 교회는 평양에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의하고 마펫과 홀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1893년 감리교 선교사 홀은 평양 서문 밖 언덕에, 장로교 선교사 마펫은 대동문 안 널다리골에 한옥을 구입하여 예배 처소로 삼았다. 

이후 감리교는 남산재로 옮겨 남산현교회, 장로교는 장대재로 옮겨 장대현교회가 되었다.

이 두 교회를 중심으로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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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재 언덕에 세워진 장대현교회 

평양 개척 선교사로 파송 받은 마펫은 1893년 10 월 대동문 안 널다리골에 있던 홍종대 소유의 가옥을 구입하여 

10여명의 교인들과 주일예배를 드렸다. 일년 사이에 수십 명의 교인이 생겼다. 

1896년에는 두 명의 초대집사(위운섭과 정윤조)를 세우기도 했다. 

1899년에는 김종섭 초대 장로를 중심으로 당회를 조직하고, 같은 해 여신도 신반석을 초대 권사로 세웠다. 

1898넌 2월에는 여신도 63명이 여전도회를 조직 하여 장로교 여전도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교인들이 급증하자, 1899년 건축헌금을 실시하여 5천여원을 모았고, 

선교부에서 2천원을 지원하여 평양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대재 언덕에 2천6 백여 평의 부지를 구입했다. 

2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완공하면서 널다리교회에서 장대현 교회로 개칭했다. 

예배당은 ㄱ자 형태로 지어 겨자 모서리에 강단과 휘장을 설치하고 죄우로 좌석을 달리하여 남녀가 따로 앉아 같은목사의 설교를 듣도록 하였다. 

ㄱ자 한옥 기와집 예배당은 총 72칸(120평 규모) 규모로  당시에는 한국 최대였다. 

1900년 6월 정초석을 세웠고, 1901년 6월 봉헌예배를 드렸는데 남녀 교인 1,500명이 운집하였다. 

1924년까지 장대현교회에서 지교회로 개척한 교회가 50여 곳이며, 목사 41명, 장로 55명을 배출했다. 

  

평양부흥운동의 발원지가 된 장대현교회 

1907년 장대현교회의 부흥운동은 평양대부흥을 이끌었으며, 장대현교회는 한국교회 부흥운둥의 발원지가 되었다. 

1907년 1월2일부터 15일까지 평안남도 사경회가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다. 

1,000여 명이 참석한 사경회에는 그래함 리, 스왈른,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블레어 선교사가 말씀을 전했으며, 

길선주 장로(목사안수 받기 직전)는 새벽기도회를 통해 회개운동을 일으켰다. 

1월 6일 저녁 집회에는 1,500 여명의 신도들이 교회를 가득 메웠다. 

영하 30도의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은 성령을 사모하는 이들로 뜨거웠다. 

6일 사경회를 위해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던 길선주 장로는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며 눈물로 회개했다. 

이때부터 수많은 이들이 숨겼던 죄를 하나씩 자복하기 시작했다. 

이 회개운동은 평양대부흥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 부흥의 불길은 평양과 평안도뿐 아니라 

서울과 개성, 공주, 수원, 인천을 거쳐 대구와 목포까지 확산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전달되어 만주지역 교회에도 부홍의 역사가 일어났다.

해방 후 장대현교회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집중 감시와 탄압을 받았고, 

1947년 11월 2대 담임목사인 김화식 목시를 비롯하여 수십 명의 교인들이 반공운동 혐의로 인민보위부에 체포된 후 순교의 갈을 걸었다. 

이 후 장대현교회는 사실상 폐지되고 예배당은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했다가 1950년 6.25 전쟁 중 폭격을 맞아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성령의 부흥이 일어났던 평양은 전혀 딴 세상으로 바뀌었다. 

장대현교회가 있던 장대재 언덕에는 평양학생 소년 궁전이, 남산현교회가 있던 남산재 언덕에는 인민대 학습당이 들어섰다. 

이스라엘 시온산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지금은 이슬람 황금서원이 들어 서 있다.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불렸던 평양의 장대재 언덕에는김일성 동상이 세워져있다. 

같은운명 같은모습의 두 예루살렘! 

성지회복의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모두가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이 땅의 예루살렘을 회복 시켜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