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유산을 찾아서
아팠지만 아름다운 베를린
글 |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독일 남쪽 도시 뮌헨에서 오래도록 살았지만,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독일 북쪽에 위치한 베를린은 뮌헨에서 다섯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도
유학생이었던 나는 왠지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독일에 온지 얼마 안 되어 나는 독일의 통일을 눈앞에서 보게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동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민족의 재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의 기쁨도 잠시, 물가는 오르고 경저는 어려워졌다.
그 여파는 유학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사람들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소문에는 구 동베를린 지역의 주민들이 외국인들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폭력을 가한다는것이었다.
그래서였던가, 나는 유학생활 동안 단 한번도 베를린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런데 지난 7월 22~26일 베를린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꿈꾸며 나는 마음속에서 잊고 있었던 베를린을 찾았다. 중앙역에 도착한 나는 거대한 현대식 역사를 보고 놀랐다.
2006년 5월 26일 매르켈 독일총리가 개막식을 한 중앙역은 베를린이 독일의 수도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내가 다녀본 독일도시 중 이토록 현대식의 웅장한 역은 보질 못했다. 이것이 베를린에서 받게 될 감동의 시작이었다.
유대인을 추모하는 베를린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서울의 1.5배의 면적에 약 370만 명이 살고 있는 독일 제1의 도시다.
서울의 인구 천만명보다 적은 인구가 살지만 독일 16개주 중에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다.
서울보다 넓은 베를린에는 가는 곳마다 두 개의 역사 흔적을 만나게 된다.
유대인 학살추모 기념 장소와 동서베를린 장벽 및 통일의 현장이다. 독일연방의회 안에도 두 역사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학살된 600만 유대인을 추모하는 기념비 공원이 있다.
2711개의 콘크리트 덩어리로 만들어진 기념비의 정식 명칭은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 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만에 세워진 기념비는 가로세로 규격은 같지만 모두 다른 높이를 지닌
콘크리트 블록으로 마치 거대한 공동 묘지처럼 보인다. 넓은 면적에 조성된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에는 관광객뿐만 아니라,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부모와 함께 다녀간다. 베를린 길을 따라 걷다보면 유대인을 추모하는 기념비들을 종종 만나 게 된다.
독일인들은 유대인 학살 현장을 보존하고 추모하며,
교육을 통해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그들의 자녀를 교육 하고있었다.
동서베를린 분단의 역사 현장
베를린의 랜드 마크로불리는것 중에 하나가 브란덴부르크 문이다.
이 문은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명을 받아 1788년부터 1791년까지 건설되었으며,
19세기 이후 전쟁에 승리한 프로이센군 및 독일군이 개선할 때 반드시 통과하는 장소였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2차 세계대전 후 동, 서 베를린을 나누는 경계선의 기점이 되었다.
이 문은 냉전과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으나, 1989년이후 독일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이외에도 베를린 장벽 기념관과 토포그래피 박물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서 베를린 장벽을 생생히 볼 수 있다.
1961년에 세워진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도 동서베를린의 분단을 나타내는 상징적 장소다.
독일통일과 교회
베를린 곳곳에 산재한 동서분단의 아픈 흔적들은 이제 독일통일을 기념하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베를린은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씻고 용서와 화해의 도시로 거듭났다.
독일의 통일 뒤에는 독일교회의 역할이 컸다. 옛 동독지역에 있던 라이프치히의 성 니콜라이교회의 월요기도회는
독일통일의 기폭제가 되었다. 성 니콜라이 교회는 1982년 9월부터 말을 쳐서 쟁기로’ (미가4:3)라는 슬로건 하에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평화기도회를 개최했다. 동서독의 군비 경쟁이 심화되고 있던 그 때 퓌러 목사가 평화기도회를 시작했다.
이 자리에는 평화를 열망하는 다양한 분야의 모든 사람들이 동참했다.
보네베르거 목사도 월요기도회를 이끌었다. 평화기도회를 찾아오는 방 문객들은 교회 입구에 기도제목을 적어 놓은
노란색 종이와 촛불을 놓았고, 이것은 평화시위의 출발점이 되었다.
장벽 붕괴 한 달 전인 1989넌 10월 9일, 평화기도회 후 시작된 월요시위는 7만 명이 가담했고,
10월 16일에는 동독 전역으로 확산됐으며 1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평화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비폭력을 외치며 평화롭게 시위했다. 1989넌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마침내 무너졌다.
이후 11월 20일부터는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 라는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1990년 10월 3일 두 개의 독일은 마침내 '하나'의 독일이 되었다.
죽임과 억압, 분단과 폭력의 아픈 역사는 용서와 화해, 평화와 비폭력의 아름다운 역사로 바뀌었다.
베를린은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바라보며, 우리의 아픈 역사도 언젠가 아름다운 역사로 거듭나길 소망 한다.
교회의 기도와 평화의 헌신이 만들어 낸 독일의 통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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