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집 : 루터를 만나자 〈13 마지막회〉 루터의 죽음과 유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집 : 루터를 만나자 〈13 마지막회〉 루터의 죽음과 유산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 등록 2017.12.0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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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집 : 루터를 만나자 〈13 마지막회〉 


루터의 죽음과 유산 


글 |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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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사람 루터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 월 10일 독일 튀링엔 지역의 작은 도시 아이슬레벤에서 태어 났다. 

평생 우울증과 각종 질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병약한 루터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교회와 세상을 변혁하는 위대한 일을 하셨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문에 붙인 '95 개조 반박문’ 이 교회와 세상을 비꾸는 개혁의 불씨가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이 일은 루터를 인류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다.

영국출신의 교회사가 롤런드 베인턴(1894~1984) 은 영국인 중 루터의 지식 범위와 다양성을 따라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극찬한다.

영국의 성경 번역은 틴데일이 했고, 기도서는 크랜머가, 요리 문답은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이 만들었다. 

설교 스타일은  래티머에게서 유래했고, 찬송가는 와츠에게서 나왔다. 

이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다. 그런데 루터는 다섯 사람 이상의 일을 혼자서 해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휘의 풍부함과 화려함 그리고 세련된 스타일에 있어서도 루터와 견줄 사람은 셰익스피어 밖에 없다고 호평한다.

베인턴은 루터의 이런 위대함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루터의 여러 능력 가운데 한 가지 능력만 놓고 봐도 

독일인 가운데 루터만한 수준에 이른 이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 독일 역사가는 ‘‘300년 동안 실제로 루터를 이해한 사람이 딱 한 명 있는데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흐’’ 라고 칭송한다. 

베인턴은 하나님과 씨름한 사람으로 루터에 비길 만한 사람은, 

유대인 바울, 로마 사람 아우구스티누스, 프랑스 사람 파스칼, 덴마크 사람 키에르케고르, 스페인 사람 우나무노, 러시아 사람 도스토예프스키, 

영국 사람 번연, 그리고 미국 사람 에드워즈 정도라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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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지입니다!"  

위대한 루터, 그는 삶의 마지막 시기에는 두통, 이명, 요도 결석, 협심증 같은 여러 육체적 고통으로 힘들어 했다.

비텐베르크의 삶은 루터에게 순탄치 만은 않았다. 비텐베르크는 더 이상 교회개혁에 불을 붙였던 개혁도시가 아니었다. 

회중들은 루터가 말한 것 중에 어느 것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루터는 그들의 예배와 전례의 부도덕하고 불경한 모습을 보고 좌절 했다. 

서서히 비텐베르크에 질려버린 루터는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 했다. 

그러던 중 루터는 소원대로 비텐베르크를 떠날 기회를 얻었다.

이 여행은 루터에게 다시는 비텐베르크에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루터는 만스펠트백작가문의 재산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1546년 1월 17일 고향인 아이슬 레벤으로 떠났다. 

그는 세 아들과 친구 유스투스 요나를 데리고 고향을 방문했다. 

루터는 만스펠트 가문의 분쟁을 조정하는데 성공했으나, 그의 병세는 악화됐다. 

2월 17일, 루터는 몸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 날 밤 10시경, 루터는 심장 발작으로 인한 가슴통증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죽은 이들을 위해 읽어 주던 시편 31편 6절("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의 말씀과 

수도원 때부터 드렸던 기도("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맡깁니다. 당신은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주님, 신실하신 하나님’’)를 되풀이했다.

루터는 병상 곁을 지키던 사람들에게 ‘나는 이제 평안과 기쁨 가운데 떠나려 합니다. 아멘!”이라는 말로 작별을 고했다. 

마침내 그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1546 넌 2월 18일 새벽 2시 45분, 종교개혁가 루터는 달려 갈 길을 다 마치고 영원히 하나님 품에 안겼다.  

루터가 세상을 떠난 직후, 축기 이틀 전에 기록한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발견됐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거지입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가난을 소명으로 여기며 살았던 루터. 그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 하며, 

영적 가난을 위해 애쓰는 거지들’ 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우상들을 섬기지 말라 는 제1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냐님 앞에' 거지' 일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진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니 나는 ‘거지’ 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실’ 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마태5:3)고 한 예수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거지’ 일 때 천국의 참된 복을 받게 된다.

루터는 거지였다. 그래서 그는 천국을 차지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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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유산 

루터의 시신은 이틀 동안 아이슬레벤에 보존됐다. 

그리고 이틀 후 선제후의 요청으로 루터가 평생 활동 했던 비텐베르크로 이송됐다. 

운구가 있던 날 수 천명의 추종자들이 길에서 루터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설교단 아래 안장 됐다. 

묘비에는 ‘‘여기 성스러운.신학박사.마르틴 루터의 몸이 묻혀 있다. 그는 63년 2개월 10일을 산 뒤, 1546년2월18일 사망했다"는 글귀가 새겨졌다.

루터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신앙의 민주화'였다. 모두가 '사제'로서 하나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신앙의 문이 활짝 열렸다. 누구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개신교는 그 십자가 위에서 탄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