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유산을 찾아서 여성순교자 페르페투아

신앙의 유산을 찾아서 여성순교자 페르페투아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 등록 2018.03.01 21:36
  • 조회수 77

신앙의 유산을 찾아서 


여성순교자 페르페투아


글 |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지난 2월 14일 재의 수요일부터 그리스도의 수난 을 기념하는 시순절이 시작됐다. 

4월 1일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 고난, 그리고 부활을 기억하며 근신과 기도로 지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축음은 인류에게 부활의 소망이 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이 말씀처럼 

예수는 십자가에서 인류를 구원하려 목숨을 바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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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의 역사 위에 세워진 기독교 

기독교 초기 역사에도 신앙을 지키려 목숨을 바친 이들이 있었다. 첫 번째 순교자는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다. 

그 뒤를 이어 예수의 제자 야고보와 베드로, 바울이 순교했다. 64년 로마시가 화재로 불탔을 때 네로황제는 그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박해로 시름해야 했다. 이후에도 로마제국의 박해로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박해와 순교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전 로마제국으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합법적인 종교로 승인했다. 

데오도시우스 대제는 480년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했다. 이처럼 기독교는 순교의 역사 위에 세워졌다. 


기독교인이란 이름을 포기하지 않은 페르페투아 

기독교 초기 순교자 중 페르페투아( ~ 203.3.7)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일찍 결혼해 엄마가 된 페르페투아는 오빠 사투루스와 함께 기독교신앙을 알게 되어 세례를 받고자 했다. 

이 무렵 로마제국의 세베루스 황제는 202년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페르페투아는 박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리를 몰래 배우다 발각되어 체포됐다. 

하지만 그녀는 감옥으로 가는 도중 쉬는 틈을 이용해 세례를받았다. 그녀의 나이 22살이었다. 

아버지는 감옥으로 딸 페르페투아를 찾아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페르페 투아의 태도는 분명했다.

 “아버지, 이게 보이세요? 예를 들어서, 이 꽃병, 혹은 물병, 혹은 이게 무엇이든지 말예요.'’ 

“그래 보인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이 꽃병을 꽃병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름 지을수 있을까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럴 순 없지!'' 

페르페투아는 “그렇다면 저도 기독교인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불릴 수 없습니다. ”라고 단호히 말했다. 

이 말에 아버지는 몹시 화가 나 돌아갔다. 

며칠 후 페르페투아는 심문을 받기 위해 공개 재판정에 끌려갔다. 

그녀의 심문 차례가 됐을 때 아버지가 그녀의 갓난 이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아버지는 단에 서 있는 딸에게 예원했다. 

‘내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느냐?' 그러자 지방관인 힐라리아누스가 페르페투아를 향해 소리쳤다. 

‘당신 아버지의 흰머리를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젖먹이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황제를 위해 제사를 드리시오!” 

페르페투아는 ‘‘아닙니다” 며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아버지는 딸의 결심을 바꾸지 못하고 재판정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그는 로마 군인들로부터 심한 매질을 당했다. 

힐라리아누스는 페르페투이를 포함해 잡혀온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맹수에게 던져서 죽이라는 형을 선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페투아는 ‘기독교인’ 이라는이름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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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엄마,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의 순교 

203넌 3월 7일, 세베루스 황제는 아들의 생일을 맞아 백성들에게 오락거리를 선물했다. 

그것은 카르타고의 거대한 원형 경기장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맹수들에게 던져 축이는 것이었다. 

드디어 처형 날이 되어 페르페투아가 경기장에 던져졌다. 젊은 여자들에게는 미친 소를 풀어 싸우게 했다. 

소가 페르페투아의 옆구리를 들이 받았다.그녀는 많은 피를 흘렸지만 죽지 않았다. 

간신히 일어난 그녀는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허벅지를 가리고 형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쓰러진 펠리키타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페르페투아의 몸종이자 산앙의 동반자였다. 

로마군인은 다시 표범을 풀어 페르페투아를 물게 했다. 표범의 공격에도 그녀는 아남았다. 

갈비뼈를 심하게 다쳐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진 그녀는 검투사에게 목을 쳐달라고 부탁을 했다. 

손을 떨고 있는 검투사에게 오히려 목을 내밀어 최후를 마쳤다. 

페르페투아는 자신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정한 영이 자신의 순교를 방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린 아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녀는 순교의 길을 택했다.  

몸종 펠리키타스는 잡혔을 당시 임신 8개월이었다. 임신한 여인을 처형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다른 감옥에 있었다. 

사형집행일이 다가올수록 그녀는 자신의 순교가 연기될 것임을 알고 심히 불안했다. 

그녀는 일반 죄인들 사이에서 축고 싶지 않았댜 그리하여 펠리키타스는 신앙의 동료들과 함께 죽게 해달라고, 

맹수에게 던져지기 전에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한 대로 사형 집행 이틀 전에 진통이 왔고, 

산고 끝에 건강한 딸을 낳을 수 있었다. 이렇게 낳은 딸은 펠리키타스의 자매 중 한 사람이 키우게 됐고, 그녀는 페르페 투아와 함께 순교자가 됐다. 

순교란 무엇인가? 

순교는 ‘세상’과 '하나님’ 과의 사이에서 하나님’ 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선택하되 죽기까지 선택하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의 순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