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위 후스와 백조 루터를 만나다

거위 후스와 백조 루터를 만나다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 등록 2017.08.0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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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집 : 루터를 만나자 〈10〉


거위 후스와 백조 루터를 만나다 


글 |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지난 7월 10일, 인천공항을 향해 가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장대비가 쏟아질 듯했다. 오랜 동안 준비하고 기다리던 종교개혁지 순례를 떠나는 날이었다. 

영은 청년들 12명과 노대웅 목사님, 그리고 세 명의 교사가 종교개혁지 순례단에 합류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반년 동안 루터를 만나기 위해 책을 읽고 기도하고 준비한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10시간 비행 끝에 내린 프랑크푸르트 공항에는 여행사에서 나온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절모가 어울리는 30대 중반의 가이드는 열흘 동안 우리에게 독일의 루터,스위스의 칼뱅과 츠빙글리, 그리고 체코의 후스를 만나게 해 주었다.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만나는 개혁가들의 숨결은 마치 살아 있는 듯 가깝게 느껴졌다. 

우리는 프랑크푸르트를 기점으로 16개 도시를 순례하며 네 명의 종교 개혁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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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 얀 후스 

체코 프라하에서 만난 종교 개혁가는 1415넌 7월 6일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당한 얀 후스였다. 

체코어로 ‘거위’ 라는 이름의 후스는 ‘‘지금 거위는 불타서 죽지만 100년 뒤 백조가 나타날 것”이 라는 말을 남기고 화형 됐다. 

그의 예언대로 100년 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백조가 되어 나타났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 의 9 개조 반박문이 비텐베르크성교회 문에 붙던 날 거위 후스의 꿈이 실현됐다. 

그것은 교회와 세상을 ‘본질’로 되돌려 놓고자 한‘  개혁 (ad fontes, Reformation)’ 의 꿈 이었다.

독일 서남쪽 아름다운 보덴호숫가에 위치한 콘스탄츠 도시는 백조 루터를 낳은 거위 후스의 흔적이 잘 보촌되어 있다. 

후스를 이단자로 파문하고 사형 선고를 내린 콘스탄츠공의회가 열린 붉은색 지붕의 집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보덴 호숫가에 위치해 있다.

후스를 화형 시켰던 곳은 시내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에 있다. 

일년 후 그와 동행한 친구 히에로니무스가 화형된 곳이기도 하다.

콘스탄츠 시에서는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1862넌 화형된 장소에 기념비를 세웠다. 

교회갱신과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외쳤던 후스의 신념을 죽음조차 막지 못했다.

 ‘‘진리의 유일무이한 원천은 성경에 있다.'’ 고 확신한 후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타오르는 불길 속에 사라졌다. 

그가 불 지핀 장작위에 묶여 두번째 찬송을 부를 때 불길이 그의 얼굴을 휘감았고, 더 이상 박해와 고통이 없는하나님 곁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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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 마르틴 루터 

순례 열흘째 되던 날 나는 한국으로 떠나는 순례단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배웅하고 다시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 보름스와 슈파이어를 방문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로 한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는 보름스(Worms)는 8만 5천명이 사는 자그마한 도시다. 

이 작은 도시에서 1521넌 독일 황제 카를5세가 보름스 제국회의를 열어 루터를 이단자로 파문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요청으로 카를 5세는 루터를 설득시키려 했으나 루터는 굴복하지 않았다. 

1521넌 4월 26일 황제 앞에서 선 루터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사로잡힌 바 되었습니다. 나는 철회할 수도 없거니와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양심에 불복하는 것은 옳은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를 도우소서. 아멘.”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 1795~1881)은 ‘‘루터가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자신의 견해를 철회했다면, 

1789년 프랑스 혁명도, 미국이라는 나라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개혁에서 머물지 않았다. 세계의 지도를 바꾸어 놓은 '세계개혁’ 이었다. 

보름스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약 20분쯤 달리면, ‘루터나무(Lutherbaum, 루터바움)’ 가 있는 곳에 도착한다.

 ‘루터나무거리 (Lutherbaumstrasse)’ 에 있는 ‘루터나무’ 옆에는 우연이지만 바움(Baum, 나무)’ 씨 가족이 살고 있다. 

루터나무가 생긴 이야기가 재밌다. 루터가 보름스에 소환될 당시 거리에서 두 명의 할머니가 루터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 다투고 있었다. 

그중 한 할머니가 ‘만약 루터가 옳다면 이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자랄 것” 이라며 지팡이를 땅에 꽂았다. 

그런데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지금의 거목이 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루터의 견해는 온 국민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사람들끼리 다투다가 때리기까지 했을 정도다. 

보름스에서 한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가면 슈파이어 (Speyer)가 나온다. 

루터가 이 도시에 직접 머문적은 없지만, 루터의 보름스 파문을 놓고 다시 한 번 제국회의가 열린 곳이다. 

1526년 제1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는 황제 키를5세가 프랑스와의 전쟁과 투르크의 침입으로 보름스 칙령을 유보하고

종교문제의 결정권을 각 도시의 제후들에게 위임했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도 잠시 사태가 호전되자 황제는 1529년 제2차 제국회의를 소집해 루터파의 교회개혁을 중지하고 보름스칙령을 시행 할 것을 결의했다. 

이 때 루터파의 다섯 명의 제후가 부당성을 비난하는 항의서(프로테스트)를 제출했다. 

이를 지켜본 다수의 가톨릭파가 그들을 가리켜 ‘프로테스탄트’ (저항자) 라고 불렀고, 이후 ‘프로테스탄트’는 개신교를 지칭 하는 말이 되었다. 

슈파이어 제국회의를 기념하는 기억의 교회(Ged'ahtniskirche)’ 가  내 가까이에 있다. 

기억의 교회 입구에는 커다란 루터의 동상이 교황의 칙서를 짓밟고 서 있다. 

거위 후스와 백조 루터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개신 교회가 생겨났다.

인천을 떠나기 전 찌푸린 하늘은 어느 덧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었다. 죽음의 먹구름도 높이 뜬 태양을 가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