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집 : 루터를 만나자 〈8〉 - 누구나 읽게 된 성경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집 : 루터를 만나자 〈8〉 - 누구나 읽게 된 성경

글 |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 등록 2017.06.0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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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루터,이단자가 되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의 파장은 독일을 넘어 로마 교황청에까지 미쳤다. 

루터는 단지 면죄부의 오용에 대해 비판했을 뿐인데, 교황청에서는 교황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더욱이 로마교회가 보기에 루터는 ‘새로운 교회 를 세우려고 한 이단아였다.

교황청은 교황의 권위를 추락시킨 루터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신넘을 꺽질 못했다. 

이탈리아의 뛰어난 학자 출신 추기경 카에탄도, 로마교회의 대표적 신학자 요한 엑크도 루터와의 논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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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이 성에 의한 논증은 루터의 신념을 바꾸지 못했다. 루터에게 성경의 권위보다 높은 권위는 없었다. 

교황도 공의회도 성경의 권위보다 높을 수 없었다. 성경만이 교회의 최종 권위였다. 

교회는 1521년 1월 3일 교서 〈로마교황이 가르친다〉를 통해 루터를 파문했다. 

루터는 보름스제국회의 심문(1521.4.18.)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로마가톨릭교회의 영원한 이단자가 됐다.

“저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 도 자주 오류를 범했고, 서로 모순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 저를 성경의 증거나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근거들을 통하여 반박하지 않는다면 저를 지배하고 있는, 

제가 증거로 제시한 성경 말씀들로 인하여 저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 을 것입니다. 나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 아멘

1521년 보름스 칙서는 ‘루터는 이단자이며, 그의 책은 모두 불 태워져야 하고, 그를 숨겨주는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고 공표하였다. 

이후 루터는 쫓기는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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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기는 루터, 성경을 번역하다 

교황청은 이단자 루터를 잡아들이려 했으나, 작센의 영주 프리드리히 현자가 루터를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성 꼭대기 다락방에서 예륵 융커라는 기사로 변장해 약 10개월 (1521.5.4.-1522.3.1)간 숨어 지냈다. 

그러나 루터의 시련은 교회의 역사를 바꿔 놓았다. 독일어성경 이란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루터는 좁은 다락방에서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던 라틴어성경을 대중이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번역했다. 

루터 당시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신자들은 교황과 사제가 성경을 해석해 주는 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성경해석의 권한을 떠맡은 사제들은 일반신자들을 그들의 맘대로 조정하려 했다. 그러나 루터의 독일어성경으로 교회권력에 빨간불이 켜졌다. 

귀족, 수도자, 성직자 중심의 그리스도교가 대중’의 그리스도교로 재탄생하였다. 일반 신자들은 성직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 경을 읽을 수 있었다. 

루터의 성경번역은 영어 , 프랑스어 등 다양한 자국어 성경들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경번역, 보통사람의 눈높이에 맞추다 

루터는 성경을 번역할 때 단순히 문자적으로 번역하지 않았다. 그는 구약의 히브리어와 신약의 그리 스어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문자 하나하나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번역하려 했다. 

특히 루터는 “가정의 아낙네들, 거리의 아이들, 시장의 보통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대중적 눈높이의 성경번역을 추구했다. 

그는 11주 만에 독일어 신약성경을 완성했다. 1522넌 9월, 인쇄한 3천부 신약성경은 순식간에 다 팔렸다.

성경에 목말라 하던 신자들에게 루터의 독일어성경은 ‘오아시스’ 였다. 루터는 신약에 이어 구약도 독일어로 번역해 1534넌 독일어 구약성경을 배포했다.

독일어성경은 인쇄하기가 무섭게 독일전역에 판매됐다. 루터의 독일어성경은 독일교회의 표준성경이 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루터는 그가 번역한 독일어성경을 누구나 읽을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독일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전체 국민의 10%에 불과했다. 

루터는 90%의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시장과 지배층에게 학교설립을 요청했다. 

마침내 개신교 지역에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고, 루터의 독일어성경은 학교에서 오랫동안 유일한 독일어 교재로 사용되었다. 

루터가 사용한 고지(高地) 독일어는 현대표준 독일어가 되었고, 그의 성경번역은 독일어와 문법을 통일시켰다.

독일인들은 통일된 언어로 말하면서 서로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독일어의 표준화는 독일 민족주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하였고, 루터는 마침내 독일의 영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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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번역, 위클리프와 후스를 거쳐 루터가 완성하다 

성경번역은 루터 이전에 이미 영국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1320-1384)와 체코의 신학자 얀 후스 (1369-1415)에 의해 시도된 바 있다. 

1378년 위클리프는 일반신지들을 위해 라틴어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영국국회의 반대로 그의 성경은 보급되지 못했다. 

이후 위클리프에 영향을 받은 체코의 후스가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했다. 하지만 후스 의 성경에 근거한 교회개혁은 로마교회를 분노케 했고, 

그는 1415넌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린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화형됐다. 같은 해 콘스탄츠공의회는 1384년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난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판결해 

그의 저작을 불태우고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 하도록 명했다. 

교회는 ‘‘성경은 천국 열쇠와 함께 자산들에게만 맡겨졌으며,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것도 사제들만 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성경번역자들을 잔혹하게 축였다. 그러나 개혁의 물결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위클리프와 후스의 성경번역은 100넌 후 루터에 의해 완성되었다. 

루터는 ‘오직 교회’가 아니라 ‘오직 성경’을 외쳤고, 그의 성경번역으로 성경은 누구나 읽고 배울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사진a-사진c  자료  

교회는 ‘‘성경은 천국 열쇠와 함께 자산들에게만 맡겨졌으며,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것도 사제들만 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성경번역자들을 잔혹하게 축였다. 그러나 개혁의 물결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위클리프와 후스의 성경번역은 100넌 후 루터에 의해 완성되었다. 루터는 ‘오직 교회’ 가 아니라 ‘오직 성경’ 을 외쳤고, 그의 성경번역으로 성경은 누구나 읽고 배울 수 있는 하나님의 말

루터는 그가 번역한 독일어성경을 누구나 읽을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독 일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전체 국민의 10%에 불 과했다. 루터는 90%의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 해 시장과 지배층에게 학교설립을 요청했다. 마침 내 개신교 지역에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고, 루터의 독일어성경은 학교에서 오랫동안 유일한 독일어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