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인가? 믿음인가?

행위인가? 믿음인가?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 등록 2017.02.01 11:14
  • 조회수 95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집 : 루터를 만나자 〈4〉


행위인가?믿음인가? 


글 |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201702-8a.jpg

뇌우체험 : 원천으로 돌아가기 

루터가 종교개혁가가 된 데에는 두 번의 결정적 체험이 있었다. 첫 번째는 1505년 7월 2일 슈토테른 하임의 부모님을 방문하고 오던 길에 만난 ‘뇌우체 함이다. 법학과 신입생이었던 루터는 그를 강타한 낙뢰(落雷)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전율하며

 ‘하나님의 사람, 수도사로 살 것을 서원했다. 그 약속대로 보름 후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루터는 법조인이 되어 세상의 영화를 누리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했다. 마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울이 바울이 된 회심사건 같았다(행9:1-19).

하나님은 루터의 삶이 ‘원천으로(ad fontes, 근원으로) 향하길 원했다. 목마른사슴이 샘물을 찾아 (시편 42:1) 루터의 영혼은 ‘원천(샘물)인 하나님을향했다. 삶의 ‘개혁 (re-formatio, 본질로 돌아가기)’ 이 일어난 것이다.  

탑 체험:믿음의 발견 

두 번째 체험은 루터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탑안 서재에서 한 체험이었다. 루터는 그곳에서 오래전부터 씨름해 온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것은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의 

롭게 될 수 있는가? 하는 구원의 문제였다. 루터는 탑 방에서 시편과 로마서를 읽으며 죄인이 구원받는  

길을 찾아 헤랬다. 그러던 중 그의 눈이 멈춘 곳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 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1:17)구절이었다. 심장이 멎는 듯 했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행위 의 공적들이 믿음 앞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는 복음의 놀라운 체험은 그를 원천으로 돌아가게 했다. 루터는 새로 태어나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201702-8b.jpg


죄로부터의해방 

루터의 첫 번째 뇌우체험이 루터 밖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체험'이었다면, 두번째 탑 체험은 루터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복음적 해방의 체험이었다.

탑체험 이후루터는구원의 확신 위에 서게 됐다. 그는 더 이상 죄의 문제로 번민할 필요가 없었다. 죄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정절, 가난, 순종, 금식, 철야, 육신의 극기와 같은 수도원의 거룩한 생활이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교황들과 순교지들의 유골이 연옥의 형기를 단축시키는 면죄의 효과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로마의 라테라노 대성당 앞의 ‘거룩한 계단’ 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주기도문을 외울 필요도 없게 됐다. 죄를 용서 받기 위해 하루에도 몇 차례, 몇 시간씩 죄를

고해하는 행위도 부질없었다. 죄의 용서를 위한 인간의 모든 행위'들이 오직 믿음’ 하나면 충분했다. 루터의 탑 체험은 믿음의 원천에서 멀어진교회를 다시 믿음의 원천으로 돌아가게 한 ‘개혁’ 의 출발점이 되었다. 

201702-8c.jpg


하나님의 의 

루터를 죄에서 해방시킨 것은 ‘하나님의 의(義)’ 였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을 통해 하나님의 의’ 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됐다. 하나님의 의는 심판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엄격하고 벌을 내리는 심판자가 아닌, 관대하며 자비로운 구원자다. 하나님의 의는 공로(행위)를 쌓아서 얻는 능동적 의’가 아니다. 그것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시는 ‘수동적 의’ 다. 하나님의 의는율법 안에 나타나는 ‘진노의 의’ 가 아닌, 복음 안에 드러나는 ‘용서의 의’ 다. 구원의 유일한 길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물로서 믿음’ 뿐이다.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발휘하신 나머지 우리의 믿음 을 보시고 우리를 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시는 그 의라는 것을 터득했다.” 루터의 고백이다.

그렇다! 루터가 발견한 하나님의 의’ 는, 판사가 죄인에게 판결을 내려 죄 값을 치르게 하는 ‘정의’ GE義 justice)가 아니다. 그것은 죄 값을 치를 필요 없이, 아예 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는 칭의’ (稱 義 justification)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된 다. 믿음’ 은 인간의 행위나 업적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말씀을 통해 주어진다. 루터는 죄인인 인간이 새롭게 되는 전 과정을 가리켜 ‘이신칭의’ (VA信稱義: 믿음으로 죄가 없다는 취급을 받는 것)라고 불렀다(롬10:9-17).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 (sola gratia)로 ‘값없이’ 얻게 되는 칭의(의롭게 되는 것, 죄가 없다고 취급되는 것)는 어떤 행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나며,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 수용된다.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가 고난 당하고 부활했다는 것과 ‘이 모든 일이 L馮· 위하 여, 나의 죄를 위하여’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다. 한 마디로 믿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 이다. 그리스도는 마치 손과 같아서, 인간에게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혜)을 그를 통해 받는다. 그 때 인간은 변화된다.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없다.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칭의로 새로워진 인간은 새로운 행위를 하게  된다. 이제부터 내가 아닌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일하신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다.'’ (갈2:20) 

믿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 행위를 하게 하지만, 불신앙은 인간을 악한 행위로 인도한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마치 ‘나무와 열매’ 같다. 열매(행위) 가 나무(믿음)를 내는 것이 아니며, 나무(믿음)가 열매(행위) 위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