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희생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팔레스타인의 유목민들에게 있어 목자와 양의 관계는 실로 생명적 결탁의 관계였습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위하여 ‘양의 우리’를 준비합니다. 이동 시에는 목자와 양이 함께 들판에서 야숙을 하는 임시 우리를 만듭니다. 어떤 경우는 돌로 벽을 쌓아 양들을 보호하는 요새를 만들고, 비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지붕을 덮었습니다. 아침이면 목자는 문 곁에 서서 양의 수를 헤아려 점검하고, 저녁이 되어 우리로 돌아와서는 다시 문 곁에 서서 양의 수를 한 마리 한 마리 확인합니다. 수가 모자랄 때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찾아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이러한 돌봄은 직업의식만으로는 어려운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자신의 위험이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아픈 양, 병든 양, 잃어버린 양만 생각합니다. 목자는 자신의 일하는 시간, 땀 흘린 노동의 대가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목자의 관심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의 우리에 있고, 그의 전 삶의 재능과 힘이 양의 목장에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희생적 사랑으로 양들을 돌봅니다. 이런 선한 목자는 삯꾼과 대조됩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10:12)”
품꾼의 관심은 오직 자신이 받아야 할 품삯에 있습니다. 품꾼은 양을 잃어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이리떼가 공격하면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양들을 두고 홀로 도망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들의 안전을 위해 이리떼와 끝까지 싸우고 때로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양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남원이 낳은 유명한 화가 김병종은 『바보 예수』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그림에 늘 한 방울의 눈물을 그립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다른 어떤 신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뿐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며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김병종 화백은 우리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가리켜서 ‘바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지나치게 똑똑합니다. 계산적이어서 이것저것 따지는 게 많습니다. 조건을 보고 사랑하고, 보상이 있어야 희생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섬김과 헌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을 지내면서 이 땅에 선한 목자로 오셔서 바보와 같이 사셨던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갑시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우리 또한 바보 같은 사랑과 섬김과 헌신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② 선한 목자의 또 하나의 특징은 친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요10:14-15)
여기서의 ‘앎’은 양의 이름은 물론 양의 특징과 형편을 잘 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관계의 모델이 바로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의 관계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아들의 순종이었듯이, 목숨을 버린 목자의 사랑과 목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가는 양의 순종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7-18)”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결코 대적자들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8장에는 예수님이 잡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죽음의 키스가 필요 없을 만큼 분명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체포를 스스로 요구하며 대신 자기 양들인 제자들을 놓아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계명인 줄 알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죽음의 고난을 당하기로 하신 예수님의 순종을 기뻐하시고 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권한임을 선포하십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10:18)”
‘권세’는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신적 권세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목숨을 버립니다. 권세가 없어서가 아니라 버릴 권세와 다시 얻을 권세가 모두 예수님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사역이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있지만, 철저히 자발적 선택을 통한 순종임을 강조합니다. 표면적으로 그의 죽음은 종교지도자들이 잡아 죽인 결과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선택하고 그 길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버릴 권세인 십자가와 다신 얻을 권세인 부활을 통해 현재 자기를 믿는 사람들과 이후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를 통해 풍성한 삶을 주는 선한 목자이심을 선포합니다.
우리를 위해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해스스로 제물이 되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의 사랑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복음에 합당한 삶은 양인 우리가 목자의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물이 되려면, 이 세대를 본받지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주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달리 번역하면, ‘합당한’입니다. 외면적이고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 감사, 순종, 경배, 그리고 예수님의 존재와 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험이 결합된 삶이 합당한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을 지내면서 선한 목자로 이 땅에 오셔서 자발적으로 순종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갑시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복음에 합당한 예배자로 살아갑시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원하여 십자가 형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고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나음을 입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한 목자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선한 목자로 이 땅에 오셔서 바보와 같이 사셨던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 자발적으로 순종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예배자로 온전히 세워져 나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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