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에 의해 시작된 스위스 종교개혁은 취리히의 주요 가톨릭교회들을 개혁 개신교회로 바꿔놓았다. 취리히 중심부에 있는 그로스뮌스터, 프라우뮌스터, 프레디거교회, 성 베드로교회가 그 주역 교회다. 이 교회들은 교회 안에 있던 우상숭배의 모든 상징물을 제거했다. 교회에서는 더 이상 성화, 성상, 유물, 제단 장식물, 십자가 고상들을 볼 수 없게 됐다. 또한, 개혁교회는 가톨릭교회의 미사 대신 복음 설교 중심의 예배를 드렸다. 가톨릭 미사와는 달리, 성찬식은 온 회중의 참여로 거행됐고, 단순하고, 소박하며, 엄숙했다. 예배 전체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기념하고, 그와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었다. 가톨릭교회는 미사마다 성찬식을 거행하는 데 반해, 취리히 개혁교회의 성찬식은 일 년에 네 차례, 즉 부활절, 성령 강림절, 가을철, 성탄절에 거행됐다.
▪ 개혁교회의 성찬식
가톨릭교회는 성만찬 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독일의 종교개혁가 루터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본질이 변하지 않고, 대신에 그리스도가 그 요소들 ‘안에, 함께, 아래에’ 임재한다는 공재설(共在說)을 제시했다. 취리히 종교개혁가 츠빙글리는 고린도전서 11장을 근거로 성만찬은 죄의 대속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할 뿐이라는 ‘기념설’을 주장했다. 츠빙글리에게 성찬식은 상징적 기억의 의례일 뿐이다. 빵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한 희생 제사에 드려지는 몸과 피의 표징에 불과하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는 신앙의 명상을 통해서만 성만찬에 임할 뿐, 실제로 임재하는 게 아니라고 여겼다. 제네바 종교개혁가 칼뱅은 ‘영적 임재설’을 제안했다. 칼뱅은 성만찬의 현장에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해석했다. 칼뱅에 따르면,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는 상징적인 동시에 그 요소들 안에 내재 되어있는 영적 의미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은혜를 받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헌법 제4편 ‘예배와 예식’에는 성찬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성례전은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거룩한 예전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의 보이는 형태인데, 세례와 성찬을 의미한다. 성례전에 사용되는 물과 떡과 포도즙은 비록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나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 백성들 간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 교제를 가지고 그와 성도들과의 구속적 관계를 가지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성찬식이 종교개혁가들의 성찬식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영은교회도 일 년에 네 차례, 즉 새해 첫 예배, 고난 주간 성금요일 예배, 3월과 10월 첫째 주일 세례식 때 성찬 예식을 거행한다.
▪ 그로스뮌스터와 종교개혁가 불링거
취리히에는 4개의 주요 교회가 있다. 그로스뮌스터와 프라우뮌스터, 프레디거교회, 성 베드로교회다. 이 중 가장 큰 규모의 그로스뮌스터(Grossmünster)교회는 츠빙글리(U. Zwingli, 1484~1531)가 1519년에 부임해 임종 때까지 목회하며 설교하던 곳이며, 스위스 종교개혁의 출발지다. 취리히 종교개혁의 취지에 따라 1524년 교회의 오르간과 조각상들이 제거됐으며, 교회 외부도 장식이 거의 없는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로스뮌스터는 가톨릭 성당이었으나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으로 개신교회가 됐다. 이 교회의 원래 이름은 ‘취리히 교회’였다. ‘그로스뮌스터’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322년부터다. ‘뮌스터(Münster)’는 ‘수도원’이라는 뜻의 라틴어 ‘모나스테리움(Monasterium)’에서 유래된 말이다. 독일어 ‘그로스(Gross)’는 ‘크다(大)’는 뜻으로 ‘그로스뮌스터’는 ‘대수도원’이란 의미의 이름이다.
그로스뮌스터는 원래 도시 성인 펠릭스와 레굴라를 위한 예배 장소였다. 8세기 말에는 이곳에 교회의 성인들이 안치되었다. 예로부터 그로스뮌스터는 많은 시각장애인과 지체장애인이 병을 고쳤다는 거룩한 장소로 알려졌다. 성인과 성물, 성지 숭배의 원천지였던 그로스뮌스터가 오직 말씀과 그리스도 중심의 개혁교회로 거듭난 것은, 종교개혁의 성과다. 가톨릭교회는 1531년 제2차 카펠전쟁에서 크게 부상당한 츠빙글리를 고해성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의 몸을 4등분한 후 시신을 조각내어 불태웠고 재는 공중에 뿌렸다. 츠빙글리의 죽음은 처참했다. 47살의 나이로 종교개혁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츠빙글리의 후임으로 불링거 목사가 그로스뮌스터교회를 맡게 됐다. 그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완성시켰다.
그로스뮌스터교회 전면부 우측 벽에는 불링거(H. Bulliger, 1504~1575) 석상이 있다.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 그로스뮌스터에서 처음으로 설교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츠빙글리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온 듯하다고 느꼈다. 그의 설교는 참으로 강력했다.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개혁 정신으로 그로스뮌스터교회를 이끌었고, 44년간 취리히 개혁교회 의장으로서 종교개혁에 매진했다. 그는 취리히시 의회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앙공동체와 행정공동체가 상호보완하도록 했고, 구제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불링거의 취리히는 칼뱅이 주도하는 제네바와 함께 유럽 개혁교회를 이끄는 두 축이 되었다. 칼뱅의 후계자 베자는 그를 가리켜 ‘모든 기독교 교회를 돌보는 만인의 목자’라고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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