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터치
나는그 사람이 아프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글머리에 올린 재목은 대중 가요에서 가져온 것이다.
‘에피톤 프로젝트’ 라는 뮤지션이 노래를 짓고 불렀다.
물론 대부분의 가요가 그러하듯, 이 노래도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헤어진 연인이 마음 한 구석에 오래 남아서, 그 사람의 고통이 내 것처럼 느껴진다는 고백이 노래에 실렸다.
대중가요는 대체로 직설적이어서 인간의 심연까지는 건드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이 노랫말은 제법 문학적인 구석이 있다.
말하자면 이 노래엔 고통 감수성을 이야기하는 문학의 목소리가 담겼다.
굳이 연인의 그것으로 한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깊이 느끼는 사람이 고통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고,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라는 대목이 그런 감수성을 함축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람의 고통을 아파한다는 건 어떤 종류의 일인가.
타인의 고통’ 은 내 인식과 감정 바깥에 존재 하는 것이어서,
실은 우리가 감각하고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타인의 고통은 늘 타인의 고통 일 뿐이다.
우리는 고통 받는 타인에게 진심 어린 위로는 건넬 수 있을지언정,
그 사람과 동일한 무게의 고통을 겪는 일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나는 그래서 ‘고통 감수성’ 이란 일종의 능력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해 보곤한다.
너무 잘 아픈 사람은 늘 어김없이 아프고, 너무 안 아픈 사람은 최선을 다해 아픔을 피해간다.
말하자면 잘 아픈 사람은 고통의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온갖 차별에 시달리는 사회적 소수파들의 비명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어떤 능력은 타고 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능력은 학습을 통해 향상된다.
그러니까 고통의 능력 역시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익힌, 딱 그 만큼만 주어질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고통에 마음이 쉬 흔들리지 않는다.
지독한 고통을 자주 겪었거나, 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 곁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이
응당 고통의 능력치도 높을 수밖에 없다. 직업적인 이유로 정치인들과 자주 만나는 편이다.
그 가운데는 각별히 고통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은 대부분 삶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안락함 대신 더 고통 받는 쪽으로 걸어간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른바 ‘기득권’ 과 싸우면서 고통 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겨우 대변하고 있는 게 지금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나는 지금 여야 어느 한 쪽에 기울어서 말하고 있지 않다.
빈곤과 차별에 고통 받는 소수자들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일에 여야가 있을수 없다.
그것은 정치인의 기본 자질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정치판에서
고통 감수성이 충분한 정치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타인의 고통 따위에 심드렁한 사람들이 감히 '국민 행복’ 을 입에 올릴 때,
나는 화가 난다기보다 너무고통스러워 심장이 욱신거린다.
〈글 | 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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