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을 그리며

월간동행

고향의 봄을 그리며

이종원 안수집사

  • 등록 2018.06.01 22:43
  • 조회수 97

고향의 봄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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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I 이종원 안수집사 (416구역)

 

지난 4월 27일 남과 북의 두 정상이 만나 휴전선을 넘나들며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번 정상 들의 만남은 70 여 년 시행 착오의 역사 끝에 이뤄진일이라 더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정상의 만남을 지켜보면서 냐는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우리 한민족의 염원인 남북 통일의 초석이 놓여지기를, 

무엇보다 이산가족 70년의 눈물을 닦어줄 수 있기를 기도했다. 

나에게 이산기족의 눈물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특별히 영은교회에는 실향민이 많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실향민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헤어진 자식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귀가 따갑도록 듣고 또 들었다. 

부모님이 자식과 헤어진 사연은 모든 이산기족들이 그렇듯 기구하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계시는 삼촌이 그 당시 고향인 개성과 당신 누이의 집이 있는 원효로를 다녀가곤 했었다. 

그때 삼촌은 큰누이가 첫째 7살, 둘째5살, 셋째 3살 갓난아이인 나를 돌보느라고 힘드시다고 판단 했던 것 같다.

삼촌은 훗날 ‘애처러워 볼 수가없었다 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둘째와 셋째를 데리고 개성에 있는 외가에 간 것이다. 

누이가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를 때까지 외가에서 두 아이를 돌보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부모님은 둘째와 셋째와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두고 온 자식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훔치던 부모님이 눈에 선하다. 

얼마나 그리웠을까.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그 막막한 심정은 또 어땠을까. 

내 기억에는 어머니 보다 아버지가 더 많이 그리워하셨던 것 같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께서 미국에 계시는 삼촌에게 부탁을 하셨다.

 ‘북에 있는 애들 소식을 알아볼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알아보는 방법을 생각해보게나.” 

그래서 삼촌과 외숙모는 미국에서 한 이산가족 단체에 가입했고 

1985년 경부터는 본격적으로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소식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처럼, 기적처럼, 형과 누이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삼촌과 외숙모는 1998년 방북단에 합류하여 북한에 있는 고향을 방문했고, 형과 누이를 만났다. 

그 후 서신도 주고 받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삼촌은 10여 차례 북한 고향에 다녀오셨고

북한에 있는형과 누이가 부모님에게 보내는 영상편지까지 담아올수 있었다. 

헤어질 당시 5살, 3살의 형과 누이는 이제 노인이 되었고, 누이는 부모님이 보고싶다며 ‘고향의 봄' 노래를 들려 주었다. 

우리 가족은 미국에 있는 삼촌 덕분에 생사를 확인 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산가족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산가족 1세대는 대부분 돌아가셨다. 이산가족의 뿌리가 다 없어지기 전에 

서신왕래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환경 이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 놓고 하나님을 얘기할 수 있고 북녘 땅에 십자가가 세워지는 날, 

통일의 문은 활짝 열릴 것이라 확신한다. 그날 까지 통일 숙성의 시간, 세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복음이라는 영양제가 세월을 잘 숙성 시킬 것이라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