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터치 합리성이라는 축복

월간동행

|세상터치 합리성이라는 축복

정강현 기자

  • 등록 2018.02.01 16:16
  • 조회수 99

|세상터치


합리성이라는 축복 


정치권을 들요다보는 걸 업으로 삼고 있는 처지이다보니, 습관처럼 생긴 잣대가 있다.

어떤 정치인의 주장을 합리와 비합리의 기준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대체로 정치인의 주장이란 합리와 비합리가아니라, 득표와 비득표라는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 결론은 뻔하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어떤 정치인의 주장이 합리적인 것으로 판명 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게만 발생한다.

물론 정치인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다. 

대중 정치란 대중의 기호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데, 대중들이 반드시 합리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즘 온라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댓글 전쟁을 살펴보면,섬뜩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특정 정치 현안에 대해서 극단적인 표현이 난무하고, 욕설과 인격 모독도 일상화 된 풍경이 펼쳐진다. 

양 극단에 선 대중들이 합리성이 허물어진 공간에서 싸움을 벌이고, 정치인 역시 양쪽으 로 갈라져서 

그런 대중들의 목소리를 흡수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양 극단의 목소리를 비합리적이라고 힐난만할 수 있을까. 

저 섬뜩한 주장들은 실은 절절한 아우성이다. 내 존재를 돌아봐 달라는, 나를 인정해달라는, 나를 외면하지 말아달라는, 사무치는 절규이다. 

전쟁으로 가족과 생이별을 한 노인이 어떻게 북한 문제에 합리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수년째 백수로 지내고 있는 청년이 실업 대책에 대해 합리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 을까. 

한평생 전셋집만 전전하는 가장이 부동산 정책을 놓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에서 극단의 주장을 펼치는사람들은 대체로 기득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바꿔말하면, 이른바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한 집단은 기득권에 가까운 사람들일 수 있다는 애기다.

최근 들어 극단의 목소리가 자주 들리는 것만은 사실 인 것 같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비합리적으로 들린다고해서 귀를 막아버리면 안된다. 

혹여 양 극단에서 욕설이 들려 오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욕설이 아닌 비명으로 들어야 한다. 

결국 양 극단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다는 뜻도 된다. 

그러므로 합리성을 지킬 수 있는 중간자들이 양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주어야 한다. 

그래야 양 극단이 쓰러지지 않고, 합리적인 중간 지대가 조금씩 그 덩치를 키울수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에선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일 수도 있다. 

그것은 그 만큼 덜 아프다는 뜻이고, 덜 고통스럽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양 극단에 위태롭게 선 사람들에 비해 무언가를 더 가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중간자 집단이 취해야 할 윤리가 ’있다면, 그것은 ‘공감 능력' 일 것이다. 공감(empathy)이란 

다른 사람의 감정(pathy=pathos)으로 들어(empathy)가는 (em=into) 일이다. 

합리적인 중간자들은 양 극단의 비합리적 감정의 무대로 힘써 들어가 보아야 한다. 

그곳에서 양 극단과 중간자 사이에 기적적인 마음의 교류가 이뤄지게 하는 것. 그것이 합리성의 축복을 누리는 자들의 윤리이자 의무이다. 

〈글 | 정강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