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집 : 루터를 만나자 〈11〉 수도원이 루터하우스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집 : 루터를 만나자 〈11〉 수도원이 루터하우스로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 등록 2017.09.01 14:27
  • 조회수 132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집 : 루터를 만나자 〈11〉


수도원이 루터하우스로 


글 | 김명희 (동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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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도 결혼을! 

요즘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신부가 되려는 신학생이 줄어 고민에 빠졌다. 이유 중 하나가 성직자의 결혼금지 때문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재직이 젊은이들에게 달갑지 않다. 반면에 개신교목사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며 산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개신교는 목회자들의 결혼을 허용하게 되었다. 기독교 초기부터 가톨릭교회의 신부들이나 수도자들은 독신서원을 지켜야 했다. 

교회의 세속화를 막고, 하나님에 대한 봉사를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직자들의 정결서원은 지켜지지 않았다. 

사제들의 성적 타락은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1510년 루터는 아우구스부르크 수도회 일로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루터의 눈에 비친 로마는 평소에 동경하던 성스러운 로마가 아니었다. 

그가 본 것은 로마교황청과 고위성직자들의 사치와 타락이었고, 사창가를 드나드는 사제들의 추한 모습이었다. 

충격에 사로잡힌 루터는 ‘만약 지옥이 있다면 그 위에 로마가 세워져 있을것”이라며 탄식했다. 

루터의 로마여행은 훗날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루터는 〈독일 크리스챤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 〉(1520)에서 디모데전서 4장 1-4절을 근거로 ‘사제들이 결혼하는 것을 금한 것은 마귀가 명한 것’ 이라고 강변했다.

나아가 그는 사제들이 독신 혹은 결혼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에게 결혼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다. 루터의 사제 결혼허용에 대한 주장으로 많은 신부들과 수도자들이 독신서원을 깨고 교회개혁에 동참했다.

그 중 한 명이 루터의 아내가 된 카타리나 폰 보라였다.

 

신부 루터, 수녀 폰 보라와 결혼하다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는 16세 때 그림마의 님브쉔에 있는 시토교단 여자수도원인 마리엔트론에 입소했다. 

그녀가 속해 있던 수녀원에도 루터의 수도원 서약에 관한 비판적 책들이 전해졌다. 

수녀들은 루터의 글들을 몰래 돌려가며 읽었다. 그리고 수녀원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수녀들과 상담을 한 루터는 수녀원 탈출을 돕기로 했다. 그는 상인 코페에게 1523년 부활 주일밤에 12명의 수녀들을 님브쉔 수녀원에서 몰래 데려오도록 지시했다.

탈출 작전은 성공했다. 수녀 셋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아홉 명은 루터가 있는 비텐베르크로 왔다. 

루터는 수녀들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주선했고, 그 중 여덟 명이 결혼했다. 남은 한 명 카타리나도 신학생과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 신학생이 고향 방문 후 마음을 바꿔 결혼이 무산됐다. 이후에도 루터는 카타리나가 귀족자제 바움가르트너와 결혼하길 바랐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1524 년 수도자 옷을 벗은 루터는 이듬해 봄 자신이 카타리나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자기로 인해 수녀원에서 탈출하게 된 책임감 때문이었다.

장남인 루터가 결혼해 후손을 안겨주길 바라는 아버지의 소원도 한몫했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자신이 결혼함으로써 결혼에 대한 복음적 가르침을 굳게 세우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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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가정을 꾸리다

1525년 6월 13일 루터는 비텐베르크시 교회 요하네스 부겐하겐 목사의 주례로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루터의 나이 42세, 카타리냐의 나이 26세. 더 이상 사제도 수녀도 아닌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당당한 부부가 되었다.

결혼 후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루터는 날이 갈수록 아내 카타리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아내를 나의 케테(목걸이)’ 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프랑스와 베니스를 주어도 바꿀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사랑했다.

삼남삼녀의 자녀를 두었으나, 두 딸(생후 8개월, 13살)을 잃는 불운을 맞기도 했다. 루터는 가장으로서,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종종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라오테 악기를 연주하면서 즐거운 찬송시간을 갖기도 했다. 루터는 가정의 평화를 참으로 귀하게 여겼다. 

아내 카타리나는 자녀들을 키우며 집안 살림을 도 맡았다. 1542년 억척스러운 카타리나 덕에 루터가족은 비텐베르크에서 많은 가축들과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녀는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결혼 때 희사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루터하우스’로 만들었다. 

40여 개의 방들은 연일 루터를 찾는 학생들과 손님들로 넘쳐났다. 그녀는 매일 40명 이상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이 일이 그녀에게는 즐겁기만 했다. 카타리나는 음식 준비뿐 아니라 식탁대화에도 기꺼이 참여했다(탁상담화). 

그녀는 예수를 따르던 마르다와 마리아 같았다(녹10:38-42). 

루터는 카타리나가 늘 그의 곁에 있어 마귀가 그를 사로잡지 못했다’ 고 말할 정도로 그녀를 의지하고 사랑했다. 

루터하우스는 루터가 수도자 시절을 보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건물이다. 

1525넌 루터와 카타리나의 결혼으로 수도원이 가정집이 되였다. 프리드리히 선제후 가루터의 가정을 위해 수도원건물을 흔쾌히 내 준 덕분이었다. 

루터하우스에는 루터가 수도자로서 개혁가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보낸 35년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루터 삶의 터전이자 종교개혁의 거점이었던 루터하우스! 수도원이 가정이 된 개혁의 산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