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의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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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의 아름다운 동행

김명희 기자

  • 등록 2018.01.01 15:54
  • 조회수 103

29년의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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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글자 보기가 힘들어요. 누가 교정 좀 도와주세요!" 

2017년 12월 권사직에서 은퇴하는 김경원 권사님은 눈이 예전 같지 않다. 

2010년에 당뇨 망막증 진단을 받고, 이후 백내장수술까지 하면서 글자 보는 것은 물론 일상생활이 불편해졌다. 

그래도 권사님은 381호 〈동행〉이 나오기까지 헌신의 끈을 놓지 않았다. 

눈 수술 후 권사님은 은퇴할 때까지 〈동행〉과 ‘아름다운 동행 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했다. 

매월 첫 주일 어김없이 발행 되는 〈동행〉지에는 권사님의 땀과 헌신이 녹아있다. 권사님의 '29년의 동행'이 만든 〈동행〉지다. 

〈동행〉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86년 4월 27일 교회창립주일이다. 

처음 3호는 〈영은소식〉으로, 제4호부터 2009년 12월호까지는 〈영은〉이란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2010년 1월호부터는 지금의 〈동행〉으로 굳혀졌다. 

김경원 권사님은 1989년 1월 1일 주일에 발간된 제33호부터 제381호(2018년 1월호)까지 348 회의 〈동행〉 제작에 참여하였다. 

기사쓰기, 교정보기, 편집과 기획하기 등, 권사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암 수술후 찾은 영은교회 

김경원 권사님은 불교집안에서 자랐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교회 간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했다. 

그러던 중 기독교 학교였던 이화여자중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매주 월요일은 학교 조회대신 예배로 시작했다. 그 후 남동생과 돈암 감리교회에 다니기도 했고, 

가까운 정동교회에서 예배드리기도 했다. 이후 기독교집안으로 시집을 갔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났다. 

그러다 마흔이 되어서 자궁경부암 수술을 받고 신앙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학교 교사였던 김 권사님은 3개월 휴직을 하고 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당일 아침, 영은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드린 동생이 목사님 말씀이 너무 좋다며 권사님에게 영은교회에 다닐 것을 권했다. 

권사님은 1987넌 9월 셋째 주일 처음 영은교회를 찾았고, 다음 주일에 등록 했다. 

10월에 고(故) 송리복 장로님(당시 권사)과 김충환 목사님(당시 전도사)이 권사님을 심방했다. 

그때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었던 김 권사님에게 김충환 목사님은 교회 신문을 위해 봉사할 것을 제안했다. 

중3때부터 학교 신문을 만들었던 권사님은 목사님의 권유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89년 1월부터 29년간 교회 〈동행〉을 위해 봉사하게 됐다. 

교회신문을 만드는 딸이 자랑스러웠던 어머니 

김경원 권사님이 학교 교사일과 두 딸을 키우며 교

회 〈동행〉에 오래도록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1997년 75세로 소천)의 전적인 도움 때문이다. 

당시 〈동행〉지를 발간할 때면 일주일에 세 번씩 모임을 갖곤 했는데, 그 때마다 어머니가 두 딸 아이와 집안일을도맡아 주셨다. 

권사님의 어머니는 교회는 다니지 않았지만 딸이 교회 일을 하는 날이면 힘껏 지원해 주셨다.

 "내 딸은 교회신문을 만들어요!”라며 동네친구들에게 딸 자랑을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였다. 

교회와는 평생 거리를두고 살았던 어머니였지만, 돌아가시기 5년 전에 하나님을 영접하고 천국에 가셨다. 

주님이 권사님에게 주신 은혜의 열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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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처럼 미련하게! 

청년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한 〈동행〉지 발행도 순탄치 만은 않았다. 

2000년 들어서면서 대학의 엄격한 출석관리로 인해 청년기자들이 홍보부를 떠났다.

몇 안 되는 인원으로 〈동행〉 지를 발간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지쳐버린 김 권사님은 2004년 1월 뉴질랜드행 비행기를탔다. 

권사님이 없으면 "누구라도 〈동행〉을 돕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당시 홍보부 차장이었던 이갑현 장로님(당시 안수집사) 은 수소문해 초등학교 교사이자 국문학 전공자였던 

김은숙 집사와남편 김덕원, 그리고 박홍규, 강연진 안수집사(당시 집사)를 영입해 청년들의 빈자리를 메웠다. 

권사님은 2004년 2월부터 새 부원들과 함 깨 다시 〈동행〉에 열정을 쏟았다. 

〈동행〉을 만들면서 김 권사님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모두의 무관심’ 이었다. 

‘‘저 사람이 알아서 하 겠지!"하는무관심이 권사님에겐 큰 아픔이었다. 

〈동행〉은 결코 혼자의 힘이 아닌, 여러 사람의 헌 신으로 만들어진다. 

권사님은 〈동행〉이 381회나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한다. 

사람의 힘으로만 했다면 〈동행〉은 벌써 없어 졌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어릴 적 ‘곰' 이라는 별명 때문일까? 권사님은 '곰처럼 미련' 하게 은퇴하는 순간까지 〈동행〉을 놓지 못했다. 

〈동행〉 전도사 

김 권사님의 〈동행〉 사랑은 남다르다. 권사님이 사는 동네의 미용실, 김밥 집, 수영장에는 영은교회 〈동행〉지를 기다리는 애독자가 많다. 

〈동행〉 전도사 김경원 권사님이 뿌린 나눔의 결실이다. 이들은 〈동행〉을 매월 받아보며 '우리 교회도 못 하는것을 영은교회가 한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일호 목사님의 달라진 사진 속 모습도 금방 알아차릴 정도로 관심이 많다. 

김 권사님은 〈동행〉을 만드는사람을넘어 〈동행〉을 ‘전하 는전도사 '가 되었다. 

꿈속에서도 기사를 쓴다는 김경원권사님! 

오히려 30넌보다 29넌간 〈동행〉에 헌신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한다. 

30년이라면 꽉 찬 숫자라서 교만할수 있는데 1년 모자라는 29년을 〈동행〉과 동행 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는 것이다. 

29년을 문서선교와 교회 역사 기록에 헌신한 김경원 권사님! 

이제 권사님은 명예기자가 되어 〈동행〉을 사랑하고 전하는 일에 백의종군’ 하고 싶어 한다. 

〈취재 | 김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