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사의 사자상과 용병제도
스위스 루체른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리는 데가 있다. 커다란 사자가 죽기 직전 상태로 누워있는 “빈사의 사자상”이다. 길이 10m, 높이 6m의 대형 사자상 위에는 “헬베티(스위스)의 충성과 용맹”(Helvetiorum Fidei ac Virtuti)이라는 라틴어 문구가 적혀 있다. 창에 찔려 죽어가는 사자는 프랑스 왕실의 백합이 새겨진 방패를 베고 있으며, 머리맡에는 스위스의 국장이 새겨진 방패가 놓여 있다. 조각상 아래에는 장교들의 이름과 전사자(DCCLX=760)와 생존자(CCCL=350)의 대략적인 숫자가 적혀 있다.
사자상은 1792년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 왕가를 수호하다가 전멸한 760여 명의 스위스 용병들의 죽음을 기리는 의미로 세워졌다. 프랑스의 왕정 수비대는 그들의 왕을 지키지 않고 모두 도망갔는데, 스위스 용병들은 루이 16세 왕가의 가족들을 지키고자 장렬히 전사했다. 그때 살아남았던 용병들은 왕이 의회 광장으로 끌려가는데 호위하고 모두 처형됐다.
로마 제국 시대 시이저의 로마군에게 쫓겨 알프스 산악지대로 옮겨 온 헬베티족은 낙농으로 겨우 연명하며, 외국 군대에 용병으로 팔려나가 목숨을 담보로 가족을 지켰다. 거친 산악환경에서 단련된 스위스 용병들은 유럽의 각국에서 환영을 받았다. 특히 1505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스위스 용병 150명을 바티칸의 근위대로 채용했다. 이후 스위스 용병은 프랑스의 왕실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1895년 이후로 스위스인들의 외국 군대 취업은 금지되었지만, 오늘날 스위스 용병의 역사적 전통이 여전히 남아있는 데는 로마 바티칸 교황수비대다. 그런데 사자상을 방문하는 관광객 중에는 스위스 용병제도가 종교개혁과 밀접하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 용병제도와 츠빙글리의 비판
스위스 내지 5개 지역은 용병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높았다. 이 지역 주민들은 자체 충분한 식량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400년~1800년 사이에 스위스 연방에서 130만~152만 정도의 남자들이 용병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귀향한 생존자는 약 30%다. 용병제가 절정에 이르렀던 1500년 무렵에는 전체인구 가운데 10~12%가 용병에 지원했다. 그 이외의 시기에는 평균 3~4%가 지원한 것으로 전해진다. 종교개혁가 츠빙글리는 용병제를 극렬히 반대하고 문제시했다. 그의 종교개혁을 통해 용병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고, 용병 참여율이 점차 감소했다.
츠빙글리는 소수의 사람이 용병제와 연금제도를 이용하여 집과 땅을 탐욕스럽게 차지하고 부를 늘려가는 불의한 상황을 비판했다. 그는 ‘용병’이라는 불의한 방법으로 소득을 올리는 걸 비판하면서 노동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했다. 츠빙글리는 연금제도가 체계적으로 뇌물과 용병제도와 연결되며, 교황과 당시 가톨릭교회 지도부와도 연관되어 있음을 고발했다. 또한, 그는 용병파병으로 외국과의 교류에서 저급한 문화가 유입되는 걸 지적했다. 사치하고 저급한 문화의 유입으로 근면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망가지게 될 거라고 우려했다. 츠빙글리는 권력자의 뇌물이 스위스 연방 사람들 안에서 질투와 배반을 일으키고 민족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도 비판했다. 용병제도로 연금을 받게 되면서 외국 권력자에 대한 종속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됨으로써 종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경계했다.
▪ 스위스 종교개혁의 시작
츠빙글리는 다수의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반면에, 이들의 피 값을 바탕으로 소수의 사람은 부정부패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사회적 위기를 고쳐 나가고자 했다. 스위스는 용병제도의 문제성을 비판하고 시작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통하여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며 착취의 구조로 내몰아 가던 경제적 불의를 극복하였고, 구조 악에 저항하면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다른 나라와의 외교적 관계에서 중립성을 지킴으로써 그 고유한 국가적 가치도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용병제도의 문제를 개선한 것은 종교개혁이 교회 내의 개혁으로만 그치지 않고, 사회경제적 불의를 치유하고, 공공의 선을 추구한 사건이 되어, 평화와 안정을 정착할 수 있게 하였던 개혁이었기에 가능했다.
츠빙글리의 용병제도에 대한 비판은 사순절 금식 규례를 개혁한다는 문제(동행 4월호 참조)로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본격적으로 기치를 들게 되었다. 다시 루체른의 ‘빈사의 사자상’ 앞에 서게 되면,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떠올리며 교회가 국가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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