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드로의 경험
베드로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있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어부로 살아가던 어느 날,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사람이 베드로의 배에 올라 무리에게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지금까지 익숙한 장소에서 살아오며 쌓아온 '선경험의 틀'이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서의 베드로가 축적해온 자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지금껏 고수해 온 자신의 틀을 무너뜨립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니, 그동안 굳게 지켜 온 '선경험의 틀'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체험이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고 하십니다. 베드로를 새로운 소명의 자리로 부르시고, 새로운 차원의 성장을 예고하십니다. 말씀을 들은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릅니다.(눅5:11) 새로운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확신이 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별을 예고하십니다. 베드로는 의아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죽음의 길이라는 사실을 조금은 감지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그는 다시 한번 묻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고 하시며, 도리어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 예언합니다. 닭이 울기까지는 기껏해야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때였습니다. 지난 3년간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던 베드로가 얼마 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니 아마 베드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한 일이 발생합니다.
■ 베드로의 실패
베드로는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체포되어 간 예수님의 재판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재판 장면을 바깥뜰에서 지켜봅니다. 이 때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외칩니다. 여종의 추궁에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마26:70)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옆에서 당당하고 용감했던 수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는 순간 작은 공격에도 속절없이 '실패자의 자리'로 추락합니다.
여종의 추궁을 듣고 두려움을 느낀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을 출입하는 '앞문까지' 이동합니다. 이때 또다른 목격자가 등장합니다. 다른 여종이 많은 사람들에게 베드로의 정체를 밝힙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위협을 느낀 베드로는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2)" 하며 강하게 부인합니다. '맹세'는 자기 저주의 요소를 첨가하는 말로, 맹세한 내용이 사실이 아닐 경우 자신이 저주를 받아 죽으리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으로 얼버무리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강력하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진실로 그 도당' 이라고 합니다. '도당' 이라는 말은 그들 중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진실로'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베드로의 정체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사람들의 말을 강하게 거부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 하고 맹세하면서까지 예수님과 상관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후 지난 3년 동안 굳게 지녔던 확신을 저버리는 처절한 실패를 경험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75)"
베드로에게 통곡은 어떤 의미입니까?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자신을 통한히 여기며 눈물 흘리는 자리입니다.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한없이 나약한 자신을 책망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리입니다. 다 예수님을 떠나도 자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큰 소리쳤던 자신이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순간을 곱씹으며 눈물을 흘리는 자리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확인하며,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는 눈물의 자리입니다. 이 눈물이 베드로가 실패를 극복할 수 있었던 첫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베드로가 다시 설 수 있었던 데는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사탄은 끊임없이 베드로를 흔들어 그의 믿음이 떨어지기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한순간 믿음이 떨어지더라도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회복시켜주시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는 갈릴리 호수였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갔었고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채 날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실망감에 사로잡힌 자들이 지친 몸으로 앉아 있습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호숫가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과 생선으로 조반을 함께 나눠 먹습니다. 조반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21:15)"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씩이나 물어보십니다. 반복된 문답을 통해 베드로에게 의도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하게 하십니다. 이 과정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과거의 사건을 뼈저리게 생각나게 합니다. 동시에 세 번의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의 손을 베드로에게 먼저 내미시며, 베드로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랑의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그 사랑의 고백에 힘이 있습니다. 더 이상 그는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실망하고 좌절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존재도 아닙니다. 과거에 지은 죄에 치여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회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도 아닙니다. 사랑의 고백이 회복되는 순간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 Innovate
데이빗 A 씨멘즈의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당신 자신의 가치와 귀중함에 대한 인식을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공급받도록 하고 당신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거짓된 영상에 의존하지 말라. 여기서 '거짓된 영상'은 과거의 실패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떨어뜨리기 위해 거짓된 영상을 계속해서 떠올리도록 요구합니다. 거짓된 영상 즉 '실패한 경험'에 얽매이게 합니다. 실패했고, 상처받았고, 주저않았던 경험의 영상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속삭임을 단호히 거부하고, 거짓된 영상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말씀의 능력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내야 합니다. 사탄이 베드로에게 '거짓된 영상'을 보여주며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없도록 믿음을 포기하게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거짓된 영상을 계속 보여주며, '과거의 실패한 경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흔듭니다.
그러한 때에 베드로를 위해,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던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우리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고 계산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기도의 힘과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말씀의 능력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주로 긍정적 경험만을 좋아하고, 부정적 경험은 기억하기조차 싫어합니다. 하지만 긍정적 경험이든 부정적 경험이든 과거의 경험을 껴안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살아온 흔적인 경험을 하나님 그의 목적을 위해 나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데 그 경험들을 사용하시도록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 절망에 한 경험이지만, 그 경험까지도 나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Innovate'입니다.
Copyright @2024 동행.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