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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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시어머니의 반대에도 남편과 지켜낸 신앙 이은자 은퇴권사님은 1955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났다. 결혼 후 27세에 서울로 올라와서 북아현동에 있는 교회에 한 달 다니다가 남편(故 이천득 집사) 사업 때문에 양남동(現 양평동)으로 이사했다. 그 이듬해에 언니(이환예 은퇴권사)의 전도로 영은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시어머니의 반대를 피해 비닐봉지에 성경을 숨겨서 남편과 함께 교회에 몰래 다녔다. 그러던 중 남편에게 병이 나자, 어머니는 남편을 무당에게 데리고 갔다. 그리고 성경을 내다 버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아들과 며느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허락했다. 이후 어머니도 파주에 있는 동네 교회에 다니다가 주님 곁으로 가셨다. 권사님도 어린 시절부터 무척 아팠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은 후 이전보다 더 밝고 건강해졌다. 권사님이 기도로 간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셔서 남편과 함께 감사기도를 드리곤 했다.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믿지 않으셨던 친정어머니도 영은교회에 다니다가 돌아가셨다. ▪ 은혜와 섬김의 교회 생활 남편과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둘이 너무 붙어 있어서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라는 말도 종종 들었다. 아픈 남편이 천국에 갔을 땐 마치 남편을 빼앗긴 느낌이었다. ‘하나님이 내게 모든 것을 다 주시고 대신 내 남편을 데려가셨구나!’라고 생각했다. 남편과 사별 후 주님은 권사님에게 권사 직분을 맡겨주셨다. 2018년에 권사로 임직받아 2025년까지 8년 동안 교회를 섬겼다. 권사님은 식당과 반찬가게 운영 경력을 살려서 2016년 집사 시절부터 교회 주방에서 2년간 봉사했다. 2018년에 권사가 된 후에는 해외선교부에서 차장을 맡았고, 이어서 예배부에서 2년, 주방 봉사 1년, 새가족부에서 2년 봉사하다가 은퇴했다. 교육 3부 어울림 부서와도 함께했다. 모든 부서의 일이 다 은혜였지만 특히 새가족부에서 봉사한 기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권사님은 여기저기 지역 교회를 다니다가 영은교회에 탐방 온 사람들에게 조용히 다가가 먼저 말을 걸고 관심을 보였다. 등록을 주저하는 사람들에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끝까지 관심 있게 지켜봤다. 마침내 그들을 영은교회에 등록할 수 있도록 인도한 일이 가장 보람 있었다. 새로 등록한 성도들이 새가족부 담당자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교회에 건의해서 유니폼도 맞췄다. ▪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수요 예배 때는 어린 딸을 업고 다니기도 했다. 덕분에 딸은 초등학교 때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들(이재환)과 딸(이현정, 중등부 교사), 외손주들(문서준, 문서후)도 영은교회에 다니고 있다. 좋아하는 찬송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다. 사업장인 식당 주방에서는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찬양을 매일 듣는다. 함께 일하는 직원 모두가 권사님 덕분에 매일 이 찬양을 들으며 일을 한다. 하루는 평소에 직장생활에 불만이 있던 직원이 그 찬양곡을 듣고 나서 순한 양처럼 변하는 모습을 봤다. 순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느꼈다.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7장 8절이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은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영은교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직분자가 일반 성도를 더 배려해 주기를 바란다. 또한 앞으로도 영은교회에 젊은 세대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은퇴 후 권사님은 교회에서 진행하는 노방전도에 동참하기로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권사님은 현재의 행복한 삶에 늘 감사드리며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지금처럼 이웃을 보살피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인터뷰&글: 윤정림 기자 -
47년 믿음 생활세속의 여정 이상의 은퇴장로님은 1944년 7월, 충청남도 보령군 대천면 요암리에서 부친 이호우와 모친 박순이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로님은 서울에 와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돈이 모이자 이를 기반으로 건축업을 시작하고 자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30대 중반, 꿈과 패기가 넘쳤던 장로님은 더 큰 포부를 품고 몇몇 투자자와 함께 주택 면허를 내어 지방에 건설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다른 경영진의 이중 삼중 분양 사기 때문에, 모든 자금을 회사에 투입했음에도 결국 부도가 났다. 이 일로 장로님은 거의 전 재산을 잃었다. 그로 인해 사랑하는 아내에게 삶의 고난과 시련을 준 것을 늘 마음 아팠했다. 겨우 전셋집을 구해 살던 어느 날, 집주인이던 故 현성협 권사님의 전도를 받아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당시 이상의 장로님은 깊은 실의에 빠져 두문불출하며 자포자기한 상태였으며, 건강마저 매우 좋지 않았다. 본래 무신론자였던 장로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님을 믿기로 결심했다. 1979년 10월, 영은교회에 등록한 후 1980년 이용남 담임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아 정식 교인이 됐다. 믿음의 여정 장로님은 ‘예수를 믿을 바에는 제대로 믿어보자’라는 각오로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했고, 교회 성경공부(성서대학) 전 과정을 수료했다. 생활이 궁핍한 와중에도 십일조 생활만큼은 철저히 준수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부도 당시 갖고 있던 차용증서마저 모두 용서하는 마음으로 없애버렸다. 이후 하나님의 복이 시작됐다. 30여 년간 부동산 중개업을 하며 다시 재산을 모았고, 이를 기반으로 건축 사업을 재개하여 재정적으로 회복했다. 이상의 장로님은 1998년 4월 9일에 집사 안수를, 2007년 4월 22일에 장로 장립을 받았다. 이후 8년간 여러 부서를 거치며 오직 겸손과 순종으로 장로 직분을 충실히 감당했다. 허남기 목사님이 추진하던 청지기 사역에서는 고아원 돕기 팀장으로 7년, 33개 청지기 사역팀 협의회장으로 3년 동안 헌신했다. 팀원들과 함께 오류애육원, 노량진보육원, 강화보육원 등을 찾아다니며 원아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직접 나누고 실천했다. 아가페 찬양대 대장으로 봉사할 때 아내와 아들과 딸 모두 함께 찬양대를 10년 넘게 섬겼다. 각종 칸타타와 영성합창제에도 참여했다. 해외 선교 사역에도 관심이 많아서 중국과 필리핀 선교 사역지 헌당 예배에 참여했고, 종현덕 선교사님이 있던 말레이시아에 제1기 선교 방문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선교분과장으로 사역할 때는 러시아(상트페테르부르크) 일원과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을 순회했다. 특히 러시아 날치크(Nalchik) 교회에서 노회장 3명과 장로 2명을 세우는 뜻깊은 자리에 안수위원으로 참여했다. 영은 노인학교(현 늘푸른학교) 제5대 교감으로서 어르신들과 야외 학습을 다니며 봉사했던 기억 역시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은퇴 후 여정 장로님의 47년 믿음 생활은 단지 교회 안에만 머무는 신앙이 아니었다. 이웃과 주변을 돌아보며 사랑을 나누고, 멀리 해외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복이 넘치는 신앙생활이었다. 2014년 12월 28일 장로님이 은퇴한 후에도 이러한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물론 은퇴 후 2019년 1월 투병 중이던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같은 해 5월 고일호 목사님마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서 마음의 고통이 컸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장로님은 매일 1시간 30분 이상 규칙적인 운동과 A4 10장 분량의 성경 암송, 1시간가량 기도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노트에 설교 말씀이나 성경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믿음의 일상을 보내며 내면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러한 꾸준한 노력으로 성경 필사 1회와 성경 통독 40여 차례를 달성했다. 잘 관리된 체력과 믿음의 열정을 바탕으로, 2023년에는 10박 11일간 성도들과 함께 이스라엘과 튀르키예 성지 순례에 참여하여 복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잊을 수 없는 선교 여행을 다녀왔다. 여전히 영등포노회 은퇴장로 모임, 장로회 산악회, 토요 노방전도팀, 갈렙 찬양대, 중보기도 사역팀, 늘푸른학교 등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장로님은 봉사와 협조를 아끼지 않는, 늘 현역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장로님은 영은교회를 위해 매일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첫째, 세움 받은 이승구 담임목사님이 영육 간에 강건하시기를 둘째, 당회와 제직 그리고 성도들이 담임목사님의 목양 사역에 큰 힘이 되기를 셋째, 다음 세대들이 말씀과 기도로 양육되어 비전 있는 세대로 성장하기를 넷째, 소외되고 궁핍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돌아보는 향기로운 교회가 되기를 장로님은 故 한은순 권사님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미정, 덕형, 현정)를 두었고 3대가 함께 영은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 시편 119편 105절과 133절을 좋아하는 장로님은 현재 노년의 삶을 애창하는 찬송가 438장 가사처럼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와 같다고 말씀한다. 글/인터뷰 김창원 기자 -
25년간 지켜온 병원 신우회 사역한상욱 은퇴권사는 1950년 충남 논산군 부적면에서 태어났다. 한 권사님은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교회 안에서 자랐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 당연해 이후 자녀들과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이들을 양육했다. 권사님은 영은교회에 1969년에 등록하고 찬양대와 교사로 봉사하며 2000년도 유치부 부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교사 직분을 잘 감당하고자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영등포노회에서 권사님을 김안과병원(구 건양병원)에 파송했다. 유치부 부장직을 감당하기도 힘들어 눈물이 났는데 병원 사역까지 맡게 된 것이다. 허남기 목사님은 순종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며 남편(구한회 은퇴안수집사)에게도 권면하셨다. 작정 기도로 준비하는 중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는 내 것이다.”라는 큰 음성을 듣고 병원 사역에 순종했다. 당시 사역과 봉사가 생각보다 힘에 겨워 많이 울며 사역했다. 권사님은 “기쁨으로 감당하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때 권사님의 힘든 마음을 기쁨으로 변화시키시는 성령님을 느꼈다. 봉사직이지만 하나님께서 권사님을 파송했음을 잊지 않고 직원과 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사역했다. 성심껏 환우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위로하며 기도했고 도움을 줬다. 사역하는 동안 예수 믿겠다는 사람도 많았고 기적과 같은 회복도 있어서 감사했다. 권사님은 2000년 4월 1일부터 2025년 12월까지 이어온 25년의 김안과병원 사역이“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하셨다”라고 고백한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환우들을 돌봤다. 주일에는 2부 예배 후 출근하여 환우들과 예배드리고 입원환자를 심방하고, 저녁 시간에 집에 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영은교회에서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심야기도회를 드렸지만, 교인들은 권사님을 생경하게 바라보며 “새신자 등록은 하셨어요?”라고 질문하기도 했다.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늘 목이 말랐다. 그럴 때일수록 김안과병원을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 준 구역’이라 생각하고 구역장처럼 열심히 섬겼다. 김안과 직원들의 입원, 수술, 치료 등의 소식을 들으면 찾아가서 기도하고 위로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했다. 전도 열매도 많았고 문제해결도 많았다. -
“승준아, 내가 예수다!”12월 21일 주일 예배를 마치고 홍보부실에서 이승준 은퇴장로님을 만났다. 비전센터 건축 후 4층 홍보부실 방문은 처음이라는 장로님에게 영은교회는 삶의 첫 교회이자 전부다. 장로님은 마흔이 다돼서 교회를 처음 찾았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는 삶의 연륜만큼이나 뜨겁다. ▪ 어머니의 불심으로 자라다 이승준 장로님은 1942년 12월,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장로님이 태어날 당시 어머니는 신실한 불교 신자였다. 1남 6녀를 낳으신 어머니에게 장로님은 하나뿐인 귀한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불심(佛心)으로 키웠다. 방학 때마다 어머니는 아들을 절에 보내서 1박 2일간 머물며 불공을 드리게 했다. 불공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이어졌다. 당시 가족 중 둘째 누나만 유일하게 교회를 다녔다. 누나는 서울대 음대를 다니면서 혜화동에서 자취했고, 그때 영락교회를 다녔다. 장로님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누나가 있는 서울로 유학 와 함께 지냈지만, 교회에 가지 않고 방학이면 영월에 있는 사찰에 가 불공을 드렸다. 이 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됐다. ▪ 영은교회 교인이 되다 대학을 마치고 장로님은 회사에 입사했다. 양평동에 있는 덕부회사에 다니면서 아내 홍수자 권사를 만나 결혼했다. 권사님 가족은 모두가 유아세례 기독교인이었고, 장모님과 처제는 영은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이후 덕부회사에서 울산으로 내려가 덕양산업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다. 원래 신앙인이었던 홍 권사는 불교 신자인 시어머니의 반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1981년, 회사 일로 서울로 오게 되었는데 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로님은 홍 권사와 장모님, 처제의 권유로 마침내 영은교회에 등록하게 됐다. 1981년 5월에 영은교회에서 생애 첫 예배를 드렸다.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지만,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분이 내킬 때만 교회에 오는 ‘말로만 교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을 전적으로 만나게 됐다. ▪ “승준아, 내가 예수다” 1986년 6월 4일, 출장차 일본에 갔다가 오는 길이었는데 엉덩이 주변이 몹시 아팠다. 허리 통증이 심해서 걸을 수 없었다. 5~6일을 집에서 쉬었으나 차도가 없어 세브란스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 진료 후 즉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이 잘 되었다는 말에 안심하며 화곡동 집에서 출근을 준비했다. 그런데 수술 부위가 악화가 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만 했다. 집에 돌아온 장로님은 요양하며 목사님의 설교집과 간증집 테이프를 매일 들었다. 성경도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내가 잘 못 살았구나. 내가 신학대학에 가야겠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홍 권사의 만류로 신학대학의 꿈은 접어야 했다. 그해 6월부터 12월까지 6개월간 허리 통증은 계속 이어졌다. 그동안에 장로님은 성경을 통독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요한계시록을 다 읽고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승준아! 승준아!”하는 음성을 들었다. “누구세요?”라고 묻자 “내가 예수다! 내가 네 허리를 고쳐 주겠다.”라고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말씀을 주셨다. 다시, “허리를 돌려라!”라는 음성과 함께 빛을 비춰 주셨다. 이후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자 하얀 염증이 발견됐다. 그동안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치료를 못 받고 통증에 시달려야 했는데, 통증의 원인이 염증임을 알게 됐다. 의사는 항생제를 처방해 주었고 이후 통증은 깨끗이 사라졌다. ▪ 감동의 시간이었던 고등부 15년 장로님은 생각했다. ‘믿음이 없는 나에게 성경도 읽게 하시고 “승준아! 승준아! 내가 예수다!”라는 음성을 듣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증거 해야 한다.’ 그러나 회사 생활을 하며 시간이 흐르자 다시 세상일에 빠져 살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로님과 일행이 탄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하며 대형 교통사고가 났다. 장로님 옆좌석에 있던 사람은 죽고 장로님은 갈비뼈와 골반이 부러졌다. 그때 장로님은 깨달았다. “내가 바뀌어야 한다!” 건강이 회복된 장로님은 교회 성경공부반인 김영한 목사님의 「인물성서반」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했다. 종강하자 목사님은 장로님에게 교회에서 봉사했으면 좋겠다고 권유했다. 그리고 즉시 장로님을 고등부 교사로 임명했다. “교회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교사로 임명했어요.”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장로님은 당시 고등부 교사들이 한 달에 한 번 기도원에 갔는데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기도원에서의 기도와 예배가 은혜였고, 교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재밌었다. 이렇게 시작한 고등부에서 장로님은 교사로서 아이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헌신했다. 학생들과 함께 고등부에서 믿음이 자랐다. 주일 새벽기도회도 열심히 섬겼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학생들에게 줄 김밥과 간식을 준비했다. 고등부 전도사님들이 장로님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했다.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그분들의 기도가 나를 신앙인으로 키우고 은혜받게 했습니다.” 마침내 장로님은 서리집사로서 고등부 부장직을 맡게 됐다. 고등부에서 보낸 15년은 장로님에게는 교사와 부장으로서 봉사하며, 장로로 임직받기까지 은혜의 시간이었다. 그때 함께 했던 학생들은 지금은 교회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고, 전도사님들은 목사가 되어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장로님에게 고등부 시절은 한 마디로 ‘감동의 시간’이었다. ▪ “네 집을 바쳐라” 이승준 장로님은 1996년 5월 12일에 안수집사가 됐고, 2003년 4월 27일에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장로가 된 후에는 선교분과, 재정부장, 혼례부장, 교육3부 부장 등 다양한 교회 부서에서 활동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순간은 교회 50주년 희년기념으로 교회가 종현덕 목사님을 말레이시아에 선교사로 파송했고, 그때 종 목사님과 함께 선교 현장에 갔던 일이다. 현재 교회 본당 건축을 마친 후 헌당식과 관련해 어려웠던 상황도 잊지 못한다. 허남기 목사님은 교회건축 후 헌당식을 하고자 했으나, 교회 건축 빚 때문에 헌당식을 할 수 없었다. 故 김창경 장로님은 빚을 갚기 전에는 헌당식을 할 수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당회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며 논의했다. 이승준 장로님도 “주님! 내가 감당하고 싶습니다!”라며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네 집을 바쳐라. 그 대신 한없이 네게 복을 주겠다.” 기도를 마친 후 장로님은 고민이 됐다. 그 주 토요일에 연말 당회가 있었는데, 당회에 앞서 故 김춘근 장로님이 이승준 장로님을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헌당식 안을 낼 테니 장로님이 이 안에 찬성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두 장로님은 “우리가 집을 바치자!”라고 다짐했다. 당회가 열렸다. 모두가 집을 바치자고 했다. 그러나 은행에서 담보로 잡은 집은 김춘근 장로님과 이승준 장로님 집이었다. 이 두 집을 담보로 은행은 교회 건축 빚을 두 장로님에게 넘겼다. 이후 교인들의 헌금으로 빚을 다 갚고 헌당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장로님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하나님은 철저한 분이셨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우리를 철저히 헌신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83세의 이승준 장로님은 지금은 눈도 허리도 약하지만,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증인된 삶’이 기쁘다. 우리 교회가 믿음의 증인을 많이 세워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해내기를 바란다. 장로님 평생에 여섯 번이나 주님이 부르셨는데, 부르심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장로님은 그 부르심에 맞게 증인된 삶을 살지 못해 후회된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노구의 장로님은 오늘도 주님의 음성을 믿으며 힘차게 신앙의 길을 걷고 있다. “네가 내 뜻에 합한 삶을 살면 내가 눈을 뜨게 해주겠다!” “그렇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 한쪽 눈이 실명된 장로님은 마태복음의 말씀을 반복해서 읽으며 매일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살고 있다. -
조용히 흐르는 자리에서 믿음은 이어지고저의 가정은 할아버지 대에서 시작된 믿음이 저를 지나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지며, 4대째 영은교회에서 신앙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제 신앙은 어느 날의 선택이라 기보다, 오랜 시간 곁에 두고 살아온 공기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믿음의 흐름 속에서 저는 지금 회계실 부회계로, 동행팀의 기자로, 그리고 2부 예배 시온 찬양대의 한 사람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많은 봉사를 한다고 말하지만, 저에게 이 자리들은 욕심의 결과라기보다 삶의 방향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르게 된 자리입니다. 그렇게 제 일상의 중심에 놓인 봉사 가운데,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지만, 교회의 리듬을 가장 정확하게 지켜내는 곳, 바로 회계실입니다. 회계실은 모든 예배의 시작과 끝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자리로, 예배당 문이 열리기 전부터 마지막 예배가 마무리될 때까지 조용히 헌금을 정리하며 교회의 질서를 지켜보는 곳입니다. 숫자를 다루는 일이지만, 그 안에 담긴 기도와 믿음을 알기에 정직함과 신뢰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눈에 띄는 박수는 없지만, 회계실이 든든하면 교회는 소리 없이 안정적으로 움직입니다. 주일 아침이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됩니다. 2부 예배 시온 찬양대의 연습은 오전 7시 30분, 아직 도시는 잠들어 있을 시간에 연습이 시작됩니다. 9시 예배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릴 찬양을 위해 마음과 소리를 하나로 맞추고, 예배가 끝난 뒤에도 연습은 이어집니다. 이른 시간과 긴 연습이 결코 가볍지는 않지만, 하루의 첫 고백을 찬양으로 드리며 예배의 문을 여는 기쁨은 이 자리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이 찬양대에서 저는 노래의 완성도보다 마음의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동행팀의 기자로서 글을 씁니다. 교회 소식과 간증, 성도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일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한 사람의 믿음 여정과 교회의 흐름을 함께 담아내는 작업입니다. 원고 마감이라는 현실적인 책임과 취재·정리의 보이지 않는 시간이 뒤따르지만, 글이 완성되고 나면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 됩니다. 글을 통해 섬긴다는 것이 말로 전하는 설교와는 또 다른 방식의 사역임을, 저는 이 자리에서 배워가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봉사는 서로 다른 모습과 리듬을 지녔지만, 모두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이 자리들은 제 신앙을 더욱 단단하게 붙들어 주었습니다. 봉사는 때로 부담으로 시작되지만, 어느 순간 은혜로 바뀌고 그 은혜는 깊이 오래 남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감당하는 이 사역 속에서, 저는 오늘도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
순종의 길을 찾아서조춘자 은퇴권사는 1940년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시골에 살면서 십 리도 넘게 떨어진 작은 교회까지 친구와 함께 걸어서 다닌 적이 있다. 그러나 우상을 숭배하는 5남매 집안의 큰 며느리가 된 이후로는 교회에 다닐 수 없었다. 그러다가 딸의 돌 때 남편의 직장 때문에 도시로 따로 나와 살게 되었다. 1986년에 아들 친구의 어머니인 지을순 권사의 소개로 영은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믿지 않는 집안 환경 가운데서도 ‘택함을 받은 딸’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주님께서 부르신 것 같다. 조 권사는 2003년 4월에 권사에 임직됐다. 다행히도 신앙심이 두터운 둘째 시누이와 시누이의 남편(장로) 덕분에 시부모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구원받고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조 권사의 남편인 故 노천호 집사 또한 교회에 다녔다. 남편의 형제자매도 둘째 시누이의 전도로 현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살고 있다. 조 권사는 집사 시절에 예전의 교육관 1층에서 8년여 동안 성경 판매를 담당했다. 그 당시에는 차도 없었기에 먼 거리를 오가며 교회로 성경책을 운반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시무권사 시절에는 다양한 부서에서 더욱 왕성히 활동했다. 상례부원으로 여러 해 섬겼고, 식당 봉사, 설악영은교회(현 영은설악센터) 봉사는 물론 여전도회 회장(2019년), 권사회 회장도 역임했다. 직분자로서 활동하는 중에 힘들고 어려울 때는 늘 순종의 통로를 찾았다. 그 길에서 주님과 나란히 걷는 동안 힘겨움과 고단함도 감사로 바뀌는 귀한 체험을 했다. 한편 전도에 남다른 열정이 있는 조 권사는 전도상을 탄 적도 있다. 조 권사는 헌신의 시간을 돌아보며 순종했던 모든 시간이 은혜였다. 성경 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18절 말씀을 가장 좋아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또한 좋아하는 찬송은 모두 다 좋아해서 하나만 고르기 어렵지만,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를 가장 좋아하는 찬송으로 꼽았다. 조 권사는 다른 교인들과의 단체 생활을 할 때 모두에게 친절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하고자 한다.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언행은 서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춘자 권사는 고령화 시대지만 우리 영은교회는 아기도 많고 청년들도 많아서 교회가 부흥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자랑스러워한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아들과 딸 가족 모두 무탈하게 사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저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날까지 순종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
양곤에서 온 선교편지:“날마다 성도의 수가 더하여지고 있습니다”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2025년도 한해의 끝자락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얀마도 계속되고 있는 내전과 경제의 불안정으로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고, 아직까지도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은 가운데 12월 말 총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 교회소식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라는 말씀과 같이 사회적 불안정과 경제적인 궁핍은 오히려 사람들을 교회로 나아오게 하는 역사를 일으켜 날마다 성도의 수가 더하여지고 있습니다. 미얀마는 현재 내전 중이라 징집명령이 시행되고 있고 사람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상황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리라는 확신이 없기에 징집된 사람들은 심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러한 가운데 한 군인은 실오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전쟁터로 가기 전 세례 받기를 요청하여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영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보기에 죽음 같은 상황도 사용하시어 선을 이루십니다. 지난 11월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성도들과 함께 전도하러 나가고 있습니다. 전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예비하신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주저하며 망설여하던 청소년들이 전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체험하며 지금은 시험 기간에도 전도하는 날이면 빠짐없이 열심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낼 뿐 아니라 전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일으키고 전도하는 자의 믿음도 자라게 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 유치원 소식 유치원 사역도 주님 나라의 확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은혜 가운데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원아들 61명에, 교사 5명이 사역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수업과 운영 방식을 요즘 미얀마 교육의 흐름에 맞춰 미얀마 교육과 영어 유치원 교육을 병행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유치원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경쟁이 시작되었고 영어 유치원이라는 명목하에 원비의 상승을 부추기는 분위기 가운데, 우리 유치원이 크리스천 유치원이라며 꺼리던 부모들도 유치원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어 가는 것을 보면서 이 또한 환경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지난 12월 12일에 성탄절 행사를 하였습니다. 이 행사에 부모님들을 포함한 원아의 친지들과 지역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원아들의 재롱을 보는 즐거운 시간이 있었습니다. 유치원 행사들은 지역사회 주민들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므로 교회 사역이나 지역 전도를 하는데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행사는 불교 문화가 기반인 미얀마 사람들에게 교회를 아무런 부담 없이 방문하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원아들의 입을 통하여 구주가 나심을 노래할 때 누구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고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며 자녀보다 소중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음을 보게 됩니다. 앞으로도 계속하여 유치원 사역을 통해 원아들에게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가기를 기도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늘 기도와 지원으로 저희와 미얀마를 도우심에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주님의 은혜가 영은교회에 넘치기를 바라며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기도제목 ① 미얀마의 12월 28일 총선이 어려움 없이 진행되도록 ② 교회 사역과 유치원 사역을 통해 믿는 자들이 많아지도록 ③ 가족의 영육 간의 강건함과 딸 주혜의 헝가리 의대 잘 마무리하고 진로와 결혼을 위해 2025.12.23 양곤에서 최동익 방영희 드립니다. -
제67기 전도폭발 훈련, 복음의 여정은 계속되다제67기 전도폭발 훈련이 9월 14일 비전홀에서 드린 개강예배를 시작으로 12주간 진행됐다. 말씀과 실습, 그리고 반복되는 만남 속에서 훈련생들은 복음을 ‘전해야 할 내용’이 아니라 ‘살아내야 할 진리’로 마주하게 되었고, 12월 7일 종강예배를 끝으로 이 여정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마무리되었다. 종강예배에서 이승구 담임목사님은 “잠재력을 찾아라”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각 사람 안에 이미 심어두신 복음의 가능성과 사명을 일깨워 주셨다. 이어진 순서에서는 1단계 훈련생들의 수료 간증과 함께, 훈련생과 훈련자들이 복음 전문 암송과 특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시간이 있었다. 이번 기수는 특히 많은 성도가 1단계 훈련에 참여했으며, 전도의 사명이 부담이 아닌 은혜의 응답으로 회복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훈련은 교실을 넘어 각자의 삶의 자리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이 은혜로운 여정 속에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다 담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변화의 한 단면을 나누고자 한다. 제67기 전도폭발 훈련에 참여한 2단계 훈련자 중 두 청년의 소감을 통해, 훈련 이후 그들의 삶과 믿음 안에서 일어난, 작지만 분명한 변화를 함께 공유한다. 이들의 고백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복음의 용기와 소망이 되기를 기대한다. 전도폭발훈련 초반에는 훈련자인 나 자신이 훈련생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컸습니다. 그러나 조원들을 만나면서 제 안에 있던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맺어주신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나아가니, 지치지 않고 오직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훈련 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주한 삶 가운데서도 복음을 선택한 이들에게 능히 감당할 힘과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많은 성도님들도 국제전도폭발 훈련을 통해 이 은혜의 여정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전도와는 거리가 멀었던 제가 우연한 기회에 전도라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전도폭발 2단계 수료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과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올려드립니다. 1단계가 훈련생으로 복음의 기초를 배우는 시간이었다면, 2단계는 훈련자로서 책임을 맡으며 한 단계 더 성숙하도록 인도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심화된 강의와 나눔을 통해 복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복음 제시 훈련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에게 담대함과 확신을 더해 주심을 분명히 경험했습니다. “전도는 은사가 아니라 사명입니다”. 이 고백처럼, 영은의 성도 여러분도 전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풍성히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
66기 전도폭발 훈련을 마치며66기 전도폭발 훈련은 6월 8일 종강예배를 끝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마무리되었다. 이번 훈련을 통해 성도들은 복음의 능력을 삶 속에서 깊이 체험하며, 전도의 사명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이 은혜로운 여정을 함께한 66기 전도폭발 3단계 훈련자들의 간증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1단계부터 품어온 다짐은 비신자이신 어머니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 삶의 기쁨이 되면서 그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고, 3단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는 보류였지만, 전도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달려 있음을 믿기에 감사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앞으로도 전도를 사명으로 여기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이웃의 전도로 시작된 믿음의 여정이 할머니를 통해 온 가족에게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가정의 7명이 구원의 은혜를 입고 모두 주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의 빚진 자로서 4단계 훈련에도 순종하며, 기도와 전도로 섬기기를 다짐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인도하신 성령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훈련생들과 함께 복음 제시와 암송에 힘쓰며 전도폭발 훈련을 은혜롭게 마칠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4단계 훈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승리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1단계부터 3단계까지 목사님과 훈련 선생님, 스텝분들의 사랑과 섬김에 감사드립니다. 전도를 위한 주의점과 유익을 잘 알려주셔서 많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전도에 더욱 힘써야겠다는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사랑으로 복음 전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도폭발 3단계를 무사히 마칠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2단계 때 친구 아내의 눈물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느꼈고, 그 감동이 3단계까지 이끌어 주었습니다. 건강의 어려움 속에서도 동기들과 강사님의 격려로 끝까지 훈련을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4단계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며 섬기길 소망합니다. ▶ 1단계 수료자 ▶ 2단계 수료자 ▶ 3단계 수료자 ▶ 4단계 수료자 ▶ 5단계 수료자 ▶ 수료간증 발표(경옥자, 유선우) ▶전도폭발훈련 종강예배 ▶ 복음전문암송 ▶ 수료간증문 발표 & 1단계 수료자 ▶ 종강식사 ▶ 특송 ▶ 청년부 수료자 단체 사진 -
"하나님의 나라 대한민국"그림이 있는 풍경 “하나님의 나라 대한민국”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66년 9월 5일 순교. 하나님이 세우시고 -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회.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의 제안으로 이윤영 목사 기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 대한민국. 회개하고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시 121:7) <글 사진 서현이 기자>
